용인 보정동고분군 龍仁寶亭洞古墳群 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래 6~7세기 무렵 조성한 대규모 공동묘지라
내 늘상 지적하듯이 신기하게도 이 무렵이 신라로서는 대규모 공동묘지가 등장하는 마지막 시기다. 이를 기점으로 더는 저와 같은 공동묘지가 나타나지 않으니 그것을 금지하는 중앙정부 법령이 강력히 시행된 증거로 본다.
이유는 묘지 포화다. 더는 묘를 쓸 곳이 없어졌단 뜻이다. 내 말이 맞는지 함 확인해 봐라. 수천기 쏟아지던 공동묘지가 신기하게 언제 없어지는지?
암튼 이 중에서도 이번에 용인시 의뢰로 한국문화유산연구원이 104호분과 125호분 두 무덤을 팠으니 둘다 이른바 횡구식석실분橫口式石室墳이라 축조시기는 6세기 말 내지 7세기 초라고 한다. 지번은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산122-9번지 일원이다.
이 중에서 104호분이 규모도 크고 구조도 이채로워 주목을 요하니
석실은 규모가 450×330×190cm(길이×너비×깊이)로 보정동고분군 무돔 즁 지금까지 확인된 것 중엔 가장 크단다.
내부 생김새들이 훅 훑어보면 된다.
두 무덤은 해발 186미터 소실봉에서 뻗어내린 작은 야산(해발 165미터) 남쪽 볕이 잘 드는 구릉지점 해발지점 92~105미터 범위에 위치한다. 앞서 말했듯이 동서 장축이며 등고선 방향과는 이 장축이 일치한다.
내부는 몽땅 도굴이라 건진 유물이 거의 없어 토기 몇점만 살아남았다.
104호가 그 규모와 축조기법에서 위용을 보여주는 편이어니와 무엇보다 호석護石이라 해서 봉분 테두리 밑둥치를 둘러친 돌담장이 특이하다.
호석 기준 대략 지름 10미터 원형이고 잔존 봉분 높이는 2미터.
놀랍게도 이 전체가 땅속에 묻힌 상태였다.
큰돌을 중간중간 놓고는 그 사이엔 상대적으로 작은 돌로 쌓아올렸으니 이런 양태는 훗날 경주쪽 신라왕릉에 12지신상이 출현하는 연원이나 전 신문왕릉 소위 지대석인가 하는 세움돌이 등장하는 시원일 수도 있다.
출토유물은 거의 없다. 처절히 도굴당한 까닭이다.
조사단 제공 공중부양 사진을 첨부하면 다음과 같다.
일부 그릇 어깨선 같은 데선 부호가 드러난다.
느닷없는 신석기 마제석기..주변 어딘가에 신석기시대 흔적이 있나 보다.
바닥 처리가 좀 달라 어떤 건 성의없이 대칼질 훅 한 듯 하고 다른건 상대적으로 정성을 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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