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2일, '용인 고려백자요지의 콘텐츠 개발 및 활성화 방안'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가 용인문화원, 경기학회,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 공동주최로 개최되었다.
약 20일 전에 이번 학술대회에서 '서리고려백자요지 정비사업 운영 현황과 방향'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의뢰받았다.
짧은 준비기간이었지만, 학술적 가치에 대한 부분은 다른 발표자가 맡기로 하였으므로,
이번 발표에서는 학술적 가치와 의미, 중요성보다는 그동안의 조사, 정비 과정과 앞으로 정비 방향에 대해서 정리하였다.
<이하 내용은 발표문 중 일부 발췌하였다.>
[일제강점기 ~ 1990년대 유적 변천 과정]
용인 서리고려백자요지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일본인 학자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에 의해 발견되었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일본의 조각가로 동생인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와 함께 조선의 도자기를 연구한 사람이었다.
1913년 조선에 들어와 처음에 ‘청자’에 매료되었다가, 야나기 무네요시를 알게 된 후 본격적으로 조선의 도자기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1924년 야나기 무네요시와 자신의 동생인 아사카와 타쿠미와 함께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는 등 조선 미술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특히 도자기에 매료된 그는 한반도 700여 곳의 가마터를 조사하는 등 “조선 도자의 신(朝鮮陶磁の神樣)”이라고 불렸다.
아마도 서리고려백자요지는 아사카와 노리타카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조사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30년대 이전에 작성된 용인지역 여러 고적조사 자료에서 서리고려백자요지에 대해 언급된 자료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조사․작성된 「경기도 고적대장(京畿道 古蹟臺帳)」, 「유적 및 유물 소재도 보고(遺蹟及遺物所在道報告)」 등에는 사지(寺址), 고분(古墳), 성지(城址), 불상(佛像), 탑(塔), 봉수지(烽燧址) 등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만, 가마터는 보고되지 않았다.
또한 일제강점기 작성(1913년 이후)된 임야조사부와 1919년 제작된 임야원도에서도 서리고려백자요지가 위치한 서리 산23번지에 유적에 대해서 별다른 내용이 작성되지 않았다.
(이 당시 작성된 임야조사부와 임야원도에서 원삼면 맹리 산42번지에 ‘건지산 봉수’가 있음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이 임야조사부 작성자는 당시에 조사 보고된 유적에 대해서 이미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임야조사부와 임야원도에 서리고려백자요지가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당시까지 공식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0~1930년대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수치지형도에서도 유적에 대한 표시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수치지형도를 통해 서리고려백자요지 생산품의 이동경로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도에서는 가마터에 대한 표시가 없지만 가마터에서 바로 동쪽 방향으로 천리 원촌마을까지 옛길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길을 통해 원촌마을까지 이동하면, 원촌마을 북쪽의 경안천 지류까지 비교적 빠르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또는 원촌마을을 지나 호동까지 이동하면 바로 경안천 지류로 합류할 수 있다.
서리고려백자요지 생산품은 고려왕실, 즉 개경으로 납품하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경안천을 통해 한강으로 나아가 서해로 이동하는 루트가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추정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좀 더 다각도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1960년대에 정양모 선생이 고려시대 초기 요지임을 확인하면서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초기청자의 표준유물로 설정된 소위 해무리굽완이 수습되어 국내 유일의 초기 고려백자 요지로 인식되었다.
1982년에 개관한 호암미술관은 1960년대 알려진 정보를 바탕으로 1983년과 1984년에 서리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해무리굽완 이외에도 청자, 철회청자, 대형기 등의 유물을 확인하여 유적 성격에 대한 궁금증을 더하였다. 이후 1984년, 1987년, 1988년 세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1차 발굴조사는 1984년 11월 19일부터 동년 12월 20일까지 진행되었다. 그리드 조사를 통해 대략적인 유구의 현황을 파악하였고, 토축요(진흙가마)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가마에 인접한 평탄대지에 조성된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퇴적구에 대한 트렌치 조사를 통해 유물 양상을 살펴보았다.
2차 발굴조사는 1987년 10월 15일부터 동년 12월 9일까지 진행되었다. 2차 발굴조사에서는 1차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토축요를 노출하였다.
특히 토축요 하부에서 벽돌가마(전축요)의 존재를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학계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퇴적구 유물을 층위별로 수습하였고, 건물지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3차 발굴조사는 1988년 5월 6일부터 6월 21일까지 시행되었다. 2차 발굴조사에서 노출된 토축요에 대한 정밀조사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길이 83m 정도의 가마가 확인되었다.
아울러 토축요 하부에 위치한 전축요에 대한 추가 조사를 실시하였다. 더하여 퇴적구 유물을 4개의 자연층위에 따라 수습하면서 고려 초 백자의 변화 양상에 대한 전모를 밝힐 수 있었다.
당시 발굴조사 성과에 대해 1988년 6월 15일자 대한뉴스로도 제작되어 방송되었던 것을 보면, 이 유적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짧은 영상 속에서 발굴 당시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영상 중간에 나오는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영상 속 인물이 누구인지가 매우 궁금하여, 여기저기 수소문해 본 결과,
왼쪽에서 두번째는 김재열 선생님(당시 호암미술관 학예실장, 前전통문화대학교 총장), 그 옆의 여성은 강경숙 선생님(충북대학교 명예교수)이란 것을 확인했다.
맨 좌우측 인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왼쪽 첫번째는 당시 조사단에 참여하고 있던 박순발 선생님(충남대학교 교수) 같다는 추측도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989년 1월 14일 용인서리고려백자요지는 사적 제329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지정면적은 4,168㎡로 서리 588번지, 서리 산23-1번지로 문화재구역만 지정되었는데, 이후 보호구역 지정 절차는 이뤄지지 않았고, 최초 지정 당시 구역과 면적이 2017년 보호구역이 지정되기 이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2010년대 정비사업 추진 현황]
2001년 항공사진을 보면, 서리고려백자요지 주변으로 하우스, 맞은편에 공장건물 신축 등 추가로 건축물과 시설물이 들어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에도 서리고려백자요지 주변에 지속적으로 시설물 신축과 형질변경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최초에 문화재구역 지정 이후 보호구역 지정이 이뤄지지 않아 문화재 인접한 곳에 하우스와 주택, 자원순환시설 등이 들어서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2015년 수립한 종합정비계획은 크게 문화재 보호구역 지정 및 확대, 서리고려백자요지 조사연구 계획, 유적 정비 계획으로 구상하였고, 5개년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세부내용은 문화재 보호구역 추가 지정 및 토지매입, 5차 발굴조사 실시 및 학술연구(학술대회),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유적 정비 방향 재설정을 위한 2차 종합정비계획의 수립, 조사 시작부터 최종 정비 전까지 유적 관리 및 안내를 위한 임시홍보관, 임시주차장 설치, 진입로 정비, 유적 안내판 설치, 가마터 수목제거 등이다.
현재 2015년 수립한 종합정비계획에 따른 기초 정비는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태이며, 2023년에는 가마터 발굴조사 및 주변 추가 시굴조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용인 서리고려백자요지는 한국 도자사 뿐만 아니라 세계 도자사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중요 유적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용인이 도자기의 발상지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적으로 용인의 대표 핵심 콘텐츠로서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서리고려백자요지에 대한 기초 정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서리고려백자요지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위한 역사문화공간 조성 역시 반드시 추진해야 할 사업이다. 유적 자체에 대한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이 사업으로 인해 ‘도자문화 발상지 용인’으로서 용인시의 도시 브랜드를 새롭게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기존에 조성된 처인성역사교육관과 연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시설이 부족한 처인지역에 새로운 문화 거점 시설로 주민들에게 다양한 문화혜택을 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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