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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당탕 서현이의 문화유산 답사기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녀간 용인 향수사(香水寺)

by 서현99 2024.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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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2009년 사이 삼성에버랜드 유원지 사업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에버랜드 부지 내 사업을 위해 전대리, 유운리 일대에 대한 조사였는데, 구제발굴조사이기도 했다.

시행처가 대기업이라서 그랬는지 조사 보고서가 2011년 간행되었지만, 조사 내용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조사된 유적 중 관심있는 곳은 바로 ‘향수사지香水寺址’다.

위치를 보면, 처인구 포곡읍 유운리 431번지 일원으로,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자동차박물관) 남쪽에 해당하는데, 지금은 에버랜드 스피드웨이 도로가 조성되었다.
 

용인 향수사지 위치(1920년대 수치지형도 표시). 향수산 줄기가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시루봉 말단 능선 사이에 형성된 좁은 곡부 상단부에 위치한다. 조망권은 남동쪽으로 열려 있으며, 전면에는 경안천으로 유입되는 유운천이 바로 인접하여 흐른다.
현재 향수사지가 있던 곳은 에버랜드 스피드웨이 도로가 조성되었다. 향수산 자락이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시루봉 말단 능선 사이에 자리한다.

 
향수산 줄기가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시루봉 말단 능선 사이에 형성된 좁은 곡부 상단부에 위치한다.

조망권은 남동쪽으로 열렸으며, 전면에는 경안천으로 유입되는 유운천이 바로 인접하여 흐른다.

발굴조사 결과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 ‘향수사香水寺’ 명문이 확인되어 이곳이 향수사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발굴조사 출토 '향수사'명 기와

 

大定26년명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1186년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향수사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으로 청도 운문사雲門寺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비문을 볼 수 있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사진:문화재청)

 
“師俗姓李氏, 諱學一, 字逢渠, 西原保安人也. 父應瞻, 不仕. 母李氏一夜夢. 龍入屋, 因而有娠. 及生有▨▨▨▨▨發, 久之不散. 其在孾孩, 一日未嘗再乳. 年甫八歲, 斷葷血, 十一, 依眞藏師落髪, 十三, 受具足戒.

後謁香水惠含師. 一日, 惠含擧, “僧問長慶, '如何, 是學人出身路.' 慶云, ‘是你出身路.'” 師於此有省. 旣而▨▨▨▨, 洞明禪旨, 又因經律論無所不究. 尤長於 『大般若』, 得三昧力. 凡人間疾病, 無問貴賤, 一切救之, 動輒有驗. 宗徒推仰, 如泰山北斗.”
 

원응국사비 비문 부분(사진:문화재청)

 
“스님은 속성이 이씨(李氏)요, 휘(諱)는 학일(學一)이며, 자(字)는 봉거(逢渠)로, 서원(西原) 보안(保安)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응첨(應瞻)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어느 날 밤 꿈에 용(龍)이 집에 들어오니 이로 인해 임신하였다. 출생함에 미쳐 ▨▨▨▨▨가 있어 퍼졌는데,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영아 시절에는 하루에 두 번 젖을 먹지 않았다. 나이 겨우 8살 때 이미 비린 채소와 고기를 끊었고, 11세에 진장(眞藏) 스님에게 의탁해 머리를 깎았으며, 13살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후에 향수(香水寺) 혜함(惠含) 스님을 뵈었다. 하루는 혜함스님이 말하기를, “어떤 승려가 장경(長慶)에게 묻기를, ‘어떠합니까, 이것이 학인(學人)이 출신(出身)하는 길이옵니까?’라고 하자 장경(長慶)이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출신(出身)할 길이다.’라고 하였다.”라 하였다. 스님이 이 말에 깨달음이 있었다. 이윽고 ▨▨▨▨ 선지(禪旨)를 깊이 밝혔는데, 또 경(經)·율(律)·론(論)을 연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더욱 『대반야(大般若)』에 능통해 삼매의 힘을 얻었다. 무릇 인간세의 질병은 귀천(貴賤)을 묻지 않고 일체(一切)를 구제하였는데, 매번 효험이 있었다. 종도(宗徒)들이 추앙(推仰)하기를 태산(泰山) 북두(北斗)와 같이 하였다.”
 
원응국사 학일(圓應國師 學一, 1052~1144)이 13세 때 향수사의 혜함스님을 찾아 갔다고 하니, 1064년이다.

따라서 늦어도 1064년 향수사는 혜함이라는 승려가 주석한 선종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혜함이 누구인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학일이 혜함과의 선문답으로 깨음을 얻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혜함은 당대에 꽤 이름난 승려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런 그가 주석하는 향수사 또한 寺勢도 작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향수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단편으로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용인현(龍仁縣) 불우조(佛宇條)에 “香水寺在 縣東二十里”라고 짧게 기록되어 있고,

1799년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香水寺在 縣東二十里今廢(續)白蓮庵在禪長山”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8세기 이전에 이미 폐사되었으며, 이후 인근의 백련암으로 사찰 명맥이 이어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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