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 선생을 모신 심곡서원(深谷書院)은 1985년, 1992년 두 차례 소장 전적을 도난당해서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그렇지만 심곡서원 강당 안에는 송시열이 찬한 1673년 강당기(講堂記), 1730년 숙종대왕 어제(肅宗大王 御製), 도암 이재(李縡, 1680~1746)가 원장으로 취임하여 제정한 1747년 심곡서원 본원 학규(本院 學規) 등 심곡서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편액들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1931년과 1933년 심곡서원 중건 당시를 기록한 중건 상량문 편액과 조광조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를 소재로 지은 한시 ‘행수가(杏樹歌)’ 편액이 남아 있는데, 찬자는 한규복(韓圭復, 1881~1967)이란 사람이다.
한규복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한 사람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올라 있는 한규복에 대한 인물 설명자료는 다음과 같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字)는 덕중(德仲)이고, 호는 온재(溫齋)이다. 창씨명은 아가키 게이후쿠(井垣圭復)이다. 주사 한만홍의 아들로 형 한규호는 구한말 군인으로 기호흥학회와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한말 관비유학생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도지사를 지낸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다.”
“1913년 1월 경상남도 진주군수로 임명되었고, 1918년에 동래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1921년 충청남도 참여관(參與官)으로 승진하였고 1924년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옮겼다. 1926년 충청북도 지사로 승진하여 근무하다가 1929년 황해도로 전근, 1934년 퇴직하였다. 일제시기 조선인 도지사 42명 가운데 엘리트 출신 7∼8명 중 한명이었다."
"일제 고위관료를 역임하며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1921년 훈6등, 1925년 훈5등, 1926년 훈4등, 1929년 훈3등 서보장을 차례로 받았으며, 1929년 11월 귀족의 예우에 준하는 종4위를 거쳐 1933년 4월 정4위에 올랐다. 서예에 능해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선전(鮮展)에서 4회나 수상하였다.”
활동 이력으로 보아, 한규복은 원래 글을 잘 짓고 글씨에도 능했던 것 같다. 실제로 해방 후에도 언론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런 한규복이 지은 심곡서원 중건기와 행수가 편액이 아직 심곡서원에 남아 있는데, 그의 이름 앞 부분이 도려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중건기, 행수가 모두 그렇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의 행적을 지워내거나, 잘못된 내용이라 삭제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2010년 심곡서원 사우 중수 시 비단에 묵서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1933년 상량문 편액과 동일한 내용이다.
이 묵서 상량문에는 편액에서 도려내진 부분을 볼 수 있는데, ‘後學副院長前承旨’라고 적혀 있다.
이를 통해 1931년~1933년 사이에 한규복이 부원장으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 승지라고 적었으나, 그가 승지를 역임하지는 않았고 광무 3년(1899년) 비서원 승(秘書院 丞)을 지냈기 때문에 승지라고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 비서원 : 갑오개혁 이후 왕명의 출납과 기록을 담당하던 관청인 비서감을 1895년 비서원으로 고쳐 불렀음
일전에 다른 포스팅에 조소앙 선생이 심곡서원 원장을 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궁금히 여겼었는데,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인 한규복이 부원장을 지내다가, 1943년 조소앙 선생이 원장을 맡았다는 사실만 보아도 1890년대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의 심곡서원의 역사는 매우 다이나믹하게 변화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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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서원과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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