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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3) 하워드 카터 – 기록화가에서 고고학자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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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하워드 카터. 출처: http://www.emmabandrews.org/.../young_howard_carter.png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는 1874년 5월 9일 영국 런던 서부 켄싱턴 Kensington 에서 11명의 형제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존 카터 Samuel John Carter 는 신문 삽화가이자 동물화가였습니다.

카터는 영국 동부 노퍽 Norfolk 주 스와팜 Swaffam 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년시절 대부분을 보냈는데 건강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화가 재능을 물려받은 카터는 이웃에 살던 제2대 애머스트 남작부인 메리 세실 Mary Rothes Margaret Cecil, Second Baroness Amherst of Hackney (1857~1919) 추천으로 식물학자이자 이집트학자인 퍼시 뉴베리 Percy Edward Newberry (1869~1949)의 기록화가로 일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하워드 카터



이집트 탐사기금 Egypt Exploration Fund 후원으로 이집트 중부에 산재한 분묘를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하던 뉴베리는 카터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열일곱 살이 되던 1891년 베니 하산 Beni Hasan ·데이르 엘-베르샤 Deir el-Bersha에서 발굴된 귀족분묘 벽화를 모사하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몇 달 후 카터는 ‘현대 고고학의 아버지 Father of Modern Archaeology’로 불리는 플린더스 피트리 William Matthew Flinders Petrie (1853~1942)텔 엘-아마르나 Tell el-Amarna* 발굴작업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이때 경험을 통해 현장에서 발굴된 모든 유물을 주관적인 물질적 예술적 가치에 관계 없이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한편, 발굴 당시 정황까지 꼼꼼하게 기록하는 그의 현대적 고고학적 기법을 현장에서 습득했습니다.


[각주 1: 텔 엘-아마르나는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Amenhotep IV/Akhenaten: 기원전 1352-1336년)이 아텐 신을 위해 처녀지에 세운 새로운 수도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텐의 지평선’을 의미하는 ‘아케트아텐 Akhetaten’으로 불렸습니다. 아켄아텐 사후 버려졌습니다.]


기록화가로 또 발굴팀 일원으로 1899년까지 이집트 탐사기금에서 활동하면서 카터는 고고학을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마스페로



1900년 1월 당시 이집트 고고학청 Egyptian Antiquities Service 청장 가스통 마스페로 Gaston Maspero (1846~1916)는 카터가 고고학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그를 상이집트 유물 총괄 감독관 Chief Inspector of Antiquities, Upper Egypt 에 임명했는데 이로서 그가 발굴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KV62 in the Valley of the Kings Fotograf/Photographer: Peter J. Bubenik (1995) • CC BY-SA 2.0


이 무렵부터 카터는 왕가의 계곡 Valley of the Kings 지역을 철저히 탐사하고 싶어했으나 자금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처럼 대학이나 박물관, 혹은 연구기관의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없던 20세기 초 카터와 같이 독자적인 발굴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발굴을 지원해줄 개인 후원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소중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미국 변호사 시어도어 데이비스 Theodore Monroe Davis (1838~1915)가 지원 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이집트에 체류하면서 발굴에 흥미를 느낀 데이비스는 이집트 고고학청으로부터 왕가의 계곡에 대한 발굴 허가권을 구입했습니다.

당시 카터의 목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제18 왕조 투트모세 4세 Thutmose IV (재위 기원전 1400~1390)** 왕묘를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하워드 카터



1903년 발굴작업을 시작한 바로 다음 해인 두 번째 시즌에 투트모세 4세 왕묘[KV43] 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카터로서는 고고학자로서의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첫 번째 성과였습니다.

왕묘는 이미 오래 전 도굴을 당해 석관을 비롯한 부장품 일부만이 남아 있었지만 벽화는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습니다.


[각주 2: 투트모세 4세는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 기원전 1390-1352년)의 부왕이자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의 할아버지입니다.]


왕가의 계곡에서의 성과를 인정 받은 카터는 1904년 말 하이집트 유물 총괄 감독관 Chief Inspector of Antiquities, Lower Egypt 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905년 술에 취한 프랑스 관람객과 이집트 직원 간 우발 말다툼이 영국과 프랑스 간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는 바람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관람객 잘못이 인정되었으나 외교적으로는 형식적인 사과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고 확신한 카터는 그러나 사과하기를 끝내 거부했고 결국 감독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고집불통이었던 카터의 이런 격정적인 기질은 이후에도 자신에게 불리한 분란과 갈등을 여러 번 초래하게 만들었습니다.


유야 미라

투야 미라

유야 투야 묘 평면도



한편 카터 사임 이후에도 데이비스는 왕가의 계곡에 대한 탐사를 지속적으로 전개했고 1905년 마침내 아멘호텝 3세 대왕비 Great Royal Wife 티예 Tiye의 부모인 유야·투야 분묘[KV46]를 발견했습니다.

앞선 회차에서 언급한 것처럼 왕가의 계곡은 파라오들만을 위한 왕실묘역이었지만 유야·투야는 아멘호텝 3세 배려로 특별히 왕가의 계곡에 분묘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발견 당시 유야·투야 미라는 관에 그대로 안치되어 있었습니다만 관 뚜껑은 열려 있었으며 미라에는 도굴꾼들이 값나가는 부적을 찾기 위해 샅샅이 뒤진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도굴꾼들이 바로 들고 나갈 수 없던 가구와 상자, 금박을 입힌 미라 마스크 그리고 군인이었던 유야를 위해 부장한 전차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무덤. 위키 Howard Carter에서



왕실 공방에서 제작된 후 왕을 비롯한 왕족들이 하사한 것이 분명한 이들 유물은 뛰어난 완성도와 섬세한 세부묘사가 돋보이는 명품이었습니다.

이들 유물이 공개되면서 유야·투야 분묘 발견은 1922년 카터가 투탕카멘의 왕묘를 발견하기 전까지 왕가의 계곡에서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굴성과로 인정되었습니다.

데이비스가 발굴한 유야·투야 부장품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 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워드 카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차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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