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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4) 하워드 카터와 카나본 경

by taeshik.kim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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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와 그의 딸 에블린 사진 출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f/Howard_Carter%2C_Lord_Carnarvon_and_Lady_Evelyn_Herbert_at_Tutankhamen%27s_tomb.jpg



1905년 영국과 프랑스 간 외교분쟁으로 하이집트 유물 총괄 감독관 Chief Inspector of Antiquities, Lower Egypt 직을 사임한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1939)는 이집트에 계속 머물면서 관광가이드 화가 골동품 거래상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꾸려나갔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영국의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 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Fifth Earl of Carnarvon (1866~1923) 경이 요양차 이집트를 방문했습니다.

부유한 귀족가문 출신으로 막대한 재산은 있었으나 인생의 뚜렷한 목표가 없던 카나본 경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스포츠를 즐겼으며 열정적으로 예술품을 수집하는 전형적인 20세기 영국 귀족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영국에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입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몇 차례 자동차 사고로 기관지에 문제가 생긴 카나본 경은 차고 습한 영국 남부의 겨울을 떠나 기온이 온화하고 습도가 낮은 곳에 머물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당시나 지금이나 유럽에서 피한避寒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 이집트를 방문했습니다.



카나본 경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 문명에 매료된 그는 자신과 함께 발굴을 진행할 경험이 풍부한 고고학자를 찾았는데 이때 당시 이집트 고고학청장이던 가스통 마스페로 Gaston Maspero (1846~1916) 가 카터를 추천했습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두 사람은 1909년 테베 서부 집단묘역이 위치한 아사시프 Asasif 지역에 대한 탐사를 시작으로 공동 발굴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카터가 주목한 것이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투탕카멘’이라는 미지의 파라오였습니다.

한데 신왕국시대(기원전 1550~1069) 왕실 전용 공동묘역인 왕가의 계곡 Valley of the Kings 에 대한 발굴 허가권을 소유한 미국 변호사 시어도어 데이비스 Theodore Monroe Davis (1838~1915)의 발굴을 통해 투탕카멘의 존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고왕국 시대(기원전 2686-2125년)부터 파라오들은 모두 5개 이름이 부여되었는데 이 중 네 번째 이름이 파라오로 즉위할 때 받는 ‘즉위명 throne name’이며 다섯 번째 이름이 태어날 때 받는 ‘탄생명 birth name’입니다.

이들 두 이름은 카르투쉬 cartouche 라는 타원형 기호에 기입되었습니다.


카나본 부부



1905년에는 투탕카멘 즉위명 ‘넵케페루레 Nebkheperure’, 즉 “태양신의 변신의 주”가 적힌 파이앙스 faience 잔 (Cairo JE 3330)이 왕실 구성원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분묘 12번 왕묘[KV 12] 근처에서 발견되었으며 1908년에는 54번 왕묘[KV 54]로 명명된 구덩이에서 미라제작에 사용된 도구와 투탕카멘 이름이 적힌 아마포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마포 조각에는 nṯr nfr nb tAwj (nb-ḫprw-ra)| mry mnw mnḫt m rnpt-ḥsb 6 “젊은 왕, 두 땅의 주 넵케페루레 민 Min 신의 사랑을 받으시는 이, 치세 6년의 아마포”라는 문구가 써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의 방으로만 조성된 분묘 58번 왕묘[KV 58]에서는 투탕카멘과 아이 이름이 적힌 금박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데이비스는 이것이 투탕카멘의 도굴된 왕묘라고 결론 내린 후 왕가의 계곡에는 더 이상 발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카터와 카나본 경은 왕가의 계곡 어딘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투탕카멘 왕묘가 남아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58번 왕묘는 너무 규모가 작고 소박했기 때문입니다.

1907년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큰 손실을 본 데이비스는 1914년 건강상 이유로 왕가의 계곡에서 철수했습니다.

이때 카나본 경이 데이비스의 발굴 허가권을 곧바로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발굴을 위한 탐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는 못했는데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카나본 경은 귀족으로서의 전시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영국으로 귀국해야 했고 카터 역시 카이로에서 영국군을 위한 외교업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17년이 되어서야 이들은 투탕카멘 왕묘 탐사 작업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신왕국시대 제19 왕조 람세스 2세 Ramesses II (재위 기원전 1279~1213)의 왕묘[KV 7]와 그의 아들 메렌프타 Merenptah (재위 기원전 1213~1203)의 왕묘[KV 8], 그리고 제20 왕조 람세스 6세 Ramesses VI (재위 기원전 1143~1136)의 왕묘[KV 9]를 이으면 나타나는 삼각형 지역에 주목한 카터는 첫 발굴 시즌이 시작된 그해 람세스 6세 왕묘 입구 아래쪽을 파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자신이 투탕카멘 왕묘에 얼마나 가까이 근접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수천 년 전 잔해에 파묻혀 있던 장인들 오두막 터를 발견한 그는 그곳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판단에 그만 작업을 중단해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결정의 배후에는 람세스 6세 왕묘를 관람하러 오는 관광객들의 이동 경로를 차단할 수도 있다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는데 발굴로 파낸 흙들이 람세스 6세의 왕묘 입구를 막아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1918년에서 1921년까지 이어지는 시즌에도 카터는 이 삼각형 지대 여러 지점에서 탐사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2년 11월 1일 카터는 신왕국시대 장인들이 머물던 오두막 터에 대한 발굴작업을 재개했습니다.

그해 여섯 번째 시즌에 해당하는 발굴작업이 시작되기 전 5년 간 기나긴 탐사작업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한 카나본 경은 그 해 여름 발굴팀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지만 카터는 그를 간신히 설득해 한 해만 더 발굴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바 있었습니다.

카터로서는 이번이 재정적인 고민 없이 안정적으로 발굴을 진행할 마지막 시즌이었습니다.

[실제로 10월 30일 무렵에는 자금이 고갈되어 먹을 것을 살 돈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카터는 요리사였던 이집트인에게까지 차용증을 써주고 돈을 빌렸습니다. 도시전설과 같은 여담이지만 카터는 이 돈을 갚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인 요리사는 1922년의 대발견 후 카터가 유명해지자 그 차용증을 집안의 가보로 아들에게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이집트학자인 요시무라 사쿠지 (吉村作治: 1943~현재)의 책 《고고학자와 함께 하는 이집트 역사기행》에 언급된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투탕카멘 #하워드카터 #왕가의계곡 #데이비스 #카나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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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3) 하워드 카터 – 기록화가에서 고고학자로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3) 하워드 카터 – 기록화가에서 고고학자로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는 1874년 5월 9일 영국 런던 서부 켄싱턴 Kensington 에서 11명의 형제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존 카터 Samuel John Carter 는 신문 삽화가이자 동물화가였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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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주 *** 

 

무덤 기호에다가 KV 라는 기호를 자주 붙임을 본다. 이는 Valley of the Kings 무덤 일련 번호다. 그 번호를 붙여 나가는 조건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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