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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평양 기생들의 추억 《녹파잡기綠波雜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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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학교


2006.05.25 09:33:47
<19세기 초반 '평양기생의 추억'>
'녹파잡기'에 기생 67명 문학적 형상화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43세가 되던 해인 1792년에는 부인 덕수이씨(德壽李氏)를 잃었으며, 이듬해에는 그렇게 의지하던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마저 저승으로 먼저 보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미스런 일에 휘말려 관직에서 쫓겨난 그가 경상도 안의현감으로 있던 자신을 찾아오자 연암 박지원은 13살 난 어리디 어린 기생을 그날 밤 제자격인 박제가 침소에 밀어넣었다.

이튿날, 연암은 초정에게 그 기생을 "데려가 소실로 삼도록 하라"고 한다.

하지만, 중늙은이 주제에 '어린소실'을 맞이했다는 주위의 눈총을 의식한 초정은 거절하고는 내키지 않은 발길을 돌렸다.




이는 19세기 초반, 경상도 지역 관기(官妓)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방(妓房)문화의 주축을 담당하면서 종합엔터테이너의 길을 걸었던 기생(妓生)에 관한 자료들은 단발성을 면치 못했다.

그런 점에서 명지대 안대회 교수가 발굴, 공개한 녹파잡기(綠波雜記)라는 소품서는 조선후기의 기방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획기적 자료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19세기 초반, 과거에 거푸 낙방한 지식인 한재낙(韓在洛)이란 사람이 쓴 이 녹파잡기는 무려 67명에 달하는 평양기생에 관한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녹파잡기


한데 한재낙이 이야기를 채록한 이들 기생은 대부분 작자 자신이 직접 만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녹파잡기는 '내가 만난 평양기생' 정도로 현대적 제목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며, 영화식 버전으로는 '평양 게이샤의 추억'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녹파잡기에는 11살 앳되디 앳된 기생부터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해 주점을 열거나 후배 기생들의 가모(假母. 일종의 대모) 역할을 하는 퇴기(退妓)에 이르기까지 부류가 다양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기생 67명은 진홍(眞紅)이며, 영주선(瀛洲仙)이며, 이봉(移鳳), 경연(輕燕), 영희(英姬), 취란(翠蘭), 차앵(次鸚), 라섬(羅蟾), 죽엽(竹葉), 죽향(竹香) 등이라고 해서 요란하다.

본명이 아닌 예명임이 분명하지만, 짙은 화장끼를 풍기기도 하고, 도도한 자태를 뿜어내기도 한다.

이 중 죽엽과 죽향은 자매인데 여기서도 돌림자(竹)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녹파잡기


녹파잡기는 기생 열전이 아니다. 문학적으로는 소품문(小品文)이라 해서 자유로운 문체를 응용한 짤막한 글들로 구성된다.

한데 소재가 기생이고, 그들의 애환에 기술 초점을 맞췄기 때문인지 문체는 무척이나 서정적이다.

예컨대 영주선이란 기생에 대해서는 "가는 눈썹에 뺨은 도톰하고, 담담한 말씨에 은근한 미소가 일품이다. 봄날 난간에 기대어 슬픈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은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고 했으며, 이봉이란 기생은 "밝은 창문 아래 정결한 서안(書案)을 놓았다. 도서는 가지런히 제 위치를 지키고 있다.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다. 말하고 웃는 모습이 담담하고도 우아하다"고 기술한 것이 그것이다.

녹파잡기


나아가 경연이란 기생에 대해서는 "복사꽃이 얼굴에 서려있고, 곱고 세련된 자태가 무리에 뛰어나다. 노을빛 치마는 가볍게 바람에 날리고 구름 같은 머리는 드높다. 그 아름답고 고운 용모와 부드러운 말씨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어여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일찍이 그가 의자에 걸터앉아 한 남자로 하여금 버선을 신기게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의기가 저절로 귀공자의 풍모가 있었다"고 말한다.

남을 위해 은혜를 베푸는 기생도 등장한다.


기생 복장


예컨대 차앵이란 기생은 대대로 음악 하는 기생 집안 소생으로서 성격이 "침착하고 차분하여 기방의 경박한 자태가 없고 규방의 조용한 여자로서 음식을 장만하고 치산(治産)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집에 머물 때 입는 옷은 거칠고 먹는 음식은 박하지만 남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것을 보면 진심으로 은혜를 베풀어 옷을 벗어주고 음식을 양보하였는데 곤란해하는 빛이라곤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녹파잡기는 훌륭한 문학작품이면서 아울러 19세기 평양에서 활동한 기생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이 틀림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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