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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962년, 백옥빈 씨가 브라질행 치차렌카 호에 몸을 실은 까닭은?

by taeshik.kim 2022.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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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차렌카호에 실은 반세기 전 브라질 이민의 꿈
송고시간 2014-04-30 17:25 김태식 기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브라질 속의 한국인' 특별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옥빈(白玉彬) 씨는 지구 반대편 머나먼 브라질 산토스항을 향해 정오에 부산항 제2부두를 출항한 화란(和蘭) 선적 치차렌카호(號)에 몸을 실었다.

12월 18일, 남쪽이라 그런지 그가 항구에 도착한 이른 아침에는 날씨가 영하로는 떨어지지 않았지만 "몹시도 쌀쌀"한 추위에 "오돌오돌 떨었다". 이날 부산 기온은 최저 1.9도, 최고 9.6도.

서울 영등포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그만둔 서른아홉 살 백씨는 남편이자 의사인 고계순 씨, 그리고 슬하 아들 3명과 딸 1명과 함께 탔다.

그를 실은 배는 오키나와와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를 거쳐 항해 21일째인 이듬해 1월 7일과 이튿날에는 각각 싱가포르와 페낭섬을 지났다. 그 사이 기후도 바뀌었다.

 

브라질 선상 이민의 단면. 1963~1965년 브라질로 이민 가는 선상에서의 적도제.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이 사진은 적도를 지날 때 지낸 의식의 단면을 담았다.



1월 10일 목요일, 날씨는 맑았고 망망대해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치차렌카호는 적도선을 코앞에 두었다. 오후 2시, 선상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내일 적도제(赤道祭)를 앞두고 예행연습을 하는 자리다.

일등, 그리고 이등실 선객 중에서 적도왕과 적도여왕을 뽑았다. 나머지 삼등객실에 탄 사람들은 순경, 의사, 이발사, 여왕의 시녀, 시종으로 뽑혔고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인어가 됐다. 그 외 여러 명은 적도왕에게 바칠 제물이 됐다.

금요일인 이튿날, 기적소리를 내며 배는 기적 소리를 내며 적도를 넘었다. 어제 연습한 대로 적도제를 지냈다.

적도왕은 인간들이 아무 인사도 없이 자신이 지키는 적도를 지키는 꼴이 "괫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경을 시켜 인간들을 불러내 재판을 하고는 의사를 불러 해부를 하고는 모두 '뿔'(pool)에 빠뜨렸다. 구경하던 선장이며 여왕, 순경까지 모조리 밀어넣었다. 물에 빠진 아이들은 재미있다고 깔깔댄다.

이날 일기에 백씨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런 놀이를 하면서 이 배는 적도를 몇 번 지났다는 기록을 세우게 되고 선객들에게 지루함을 잊게 하고 원기를 넣어 주는 것이다. 나는 일생에 한 번 있을 적도제에 참례하지 못하여 못내 아쉽다."

같은 배에 탄 박선관 씨는 나중에 쓴 이민 수기 '상전벽해'에서 적도제를 "이민선이 적도를 지날 때마다 바다의 적도왕에게 인사를 드리고 차례를 지내는 행사"라고 적었다.

"선객들은 항해 중에 적도왕의 보호를 받게 되며 무사히 여행을 하게 된다는 근거 없는 전설에서 비롯된 관습이며 여행의 지루함을 잠시나마 달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된 단막극"이라고 했다.

마침내 적도를 넘은 치차렌카호는 케이프타운을 거쳐 대서양을 지나 항해 56일째인 2월 12일 오전 7시, 커피 수출항구로 유명한 항구인 산토스항에 닿음으로써 마침내 목적지인 브라질 땅에 도착했다.

백씨 가족의 이 여행은 1966년 제5차에 이르기까지 브라질 이민단의 시작을 알린 뱃고동이다.

현재 91세, 브라질에 거주하는 백씨는 왜 고국을 등지고 브라질 이민단에 올랐을까?

항해 이틀째인 1962년 12월19일자 일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이 좁은 땅덩이에서 서로 헐뜯고 우물 안의 개구리 격으로 복짝대는 것보다 더 넓은 땅에서 마음껏 배우고 실력을 발휘해 보고 싶은 마음, 우리 자손들을 좀 더 넓게 크게 활약시키고 싶은 마음, 나아가서는 우리가 점점 발전하여 한국의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고 제2의 한국을 브라질에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이 결심의 동기였다. 하옇든 고국을 떠나고 보니 우리의 책임은 무거워지며, 새삼스레 민족의식이 강해지고 애국심이 솟아오릅니다."(표기는 일기 원문을 따름)

브라질 이민이 우리 정부가 주도한 사업이고, 1차 이민선만 해도 인솔자로 보건사회부 독고영 서기관과 취재기자로 동아일보 박순재 특파원이 동승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백씨가 말하는 이민 동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시대 분위기의 일단을 읽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왕식)이 29일 개막한 '브라질 속의 한국인'(Coreanos no Brasil) 특별전은 백씨의 이민 일기를 따라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들의 브라질 이민과 정착 과정을 정리한다.

taeshik@yna.co.kr


첫 이민자의 일기로 본 '브라질 속의 한국인'
송고시간 2014-04-28 16:48 김태식 기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민 특별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왕식)이 주한브라질문화원(원장 김용성)과 공동으로 '브라질 속의 한국인'(Coreanos no Brasil)을 주제로 하는 특별전을 마련해 29일 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 개막한다.

오는 6월 15일까지 계속할 이번 기획전은 한국과 브라질 수교 55주년, 그리고 한국인의 브라질 이민 5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로 마련된다. 브라질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공식 이민이 이뤄진 나라다.

주한브라질대사관(대사 에드문도 수쑤무 후지타)이 후원하는 이번 행사는 마침 올해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는 곳이 브라질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이번 특별전은 1963년 브라질에 도착한 첫 이민자의 한 사람인 백옥빈(白玉彬·91) 씨가 이민 출발에서부터 최근까지 쓴 일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백옥빈 씨 이민 일기



1962년 보건사회부 브라질 이민 계획서와 브라질 정부의 이민 허가서 등 외교문서를 포함한 공문서와 각종 이민사 사진자료가 등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평양을 떠나면서 가지고 간 고향의 한줌 흙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받은 바지 등 다양한 출신 배경을 지닌 다른 이민자들의 애장품도 함께 소개한다.

총 3부로 구성하는 기획전 제1부에서는 브라질 이민을 추진하게 된 배경과 항해 등의 과정을 보여준다. 관련 공문서와 당시의 각종 언론보도 기사, 기록사진과 영상, 이민자들이 가져간 애장품이 선보인다.

1960년대 초 브라질은 '떠오르는 별'이라 일컬을 정도로 미래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만큼 광활한 밀림과 농지를 개간해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노동력도 필요했다. 반면 한국은 전쟁의 폐허와 가난을 벗어나고자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해결 방안으로 해외 이민을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브라질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이렇게 해서 정부는 1962년 해외이주법(이민법)을 제정하고 브라질로 이민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1962년 12월 18일 브라질 이민단은 치차렌카호에 올라 부산항을 출발해 이듬해 2월12일 산토스항에 도착한다. 이것이 1966년 5차 이민단까지 계속된 브라질 이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브라질에는 희망만이 기다리지는 않았다.

이에 2부는 초기 농업이민 시기의 한국인 이민자들의 꿈과 좌절을 위한 코너로 마련한다. 영농 이민은 실패로 끝나고, 상파울루로 이주해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까지의 이민자들의 고난의 여정을 그린다.

마지막 3부는 상파울루 봉헤찌로 거리를 중심으로 여성 의류업계에 진출해 성공 신화를 써내려간 한인사회의 모습을 다룬다. 이들은 의류업 외에도 다방면으로 진출했다. 지난해 삼바축제에서는 한국과 한국문화를 주제로 하는 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했다.

김왕식 박물관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공식 이민국이 브라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면서 "그 이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과 함께 이주한 사람들, 6·25전쟁 후 반공포로들이 택한 나라가 브라질이라는 점 등을 통해 볼 때 한국 현대 이민사에서 브라질 이민이 차지하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taeshik@yna.co.kr

 

*** 

 

까마득히 잊고 지낸 편린인데, 마침 중앙일보 이경희 기자가 브라질 이민과 관련한 논설 하나를 썼으므로 그에 격발해 과거 기사를 끄집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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