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1939)가 투탕카멘 왕묘를 발견하게 된 경위는 앞선 시리즈에서 살펴본 대로입니다. 진짜 문제는 세기의 대발견 다음부터 발생합니다.
그 소식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었고 이와 같은 관심과 열기에 힘입어 카터는 당대 최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발굴팀을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 고대 이집트 문헌학자 앨런 가디너 Alan H. Gardiner (1879~1963)·영국 화학자이자 보존전문가 알프레드 루커스 Alfred Lucas (1867~1945)·메트로폴리탄박물관 보존전문가 아서 메이스 Arthur Cruttenden Mace (1874~1928)·영국 발굴 건축기사 아서 캘린더 Arthur Callender (1875~1936)·전속 사진사 해리 버튼 Harry Burton (1879~1940)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카터 발굴팀은 발굴기법 새 역사를 썼다고 평가받습니다. 조심스럽게 발굴해 낸 유물들은 즉각 신왕국시대 제19 왕조 세티 2세 Sety II (재위 기원전 1200~1194) 왕묘 앞에 임시로 마련된 소위 ‘작업실 lab’로 옮겨졌으며 대기하던 보존처리 전문가로부터 적절한 조치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상당수 유물이 소실되었을 것입니다.
카터는 세밀한 스케치와 함께 수천 장 작업기록 카드를 만들어 발굴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사진가 해리 버튼 역시 왕묘에 배치된 유물 모습뿐만 아니라 발굴 각 과정을 2,800여 장 고품질 유리원판에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만큼 발굴과 관련된 잡음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1914년 가스통 마스페로 Gaston Maspero (1846~1916)에 이어 이집트 고고학청장으로 새로 부임한 피에르 라코 Pierre Lacau (1873~1963)는 전임자 마스페로가 외국 고고학자들과 이들이 이집트에서 발굴한 유물 중 일부를 본국으로 반입하는 데 너무 관대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이집트에서 발굴된 유물에 대한 관리감독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19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소위 ‘1919년 혁명 Egyptian Revolution of 1919’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이집트 국민은 계급 종교 성별과 직업을 불문하고 하나로 단결하여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를 부르짖었습니다.
혁명 이후 극도로 고조한 이집트인들의 반영감정과 민족주의로 투탕카멘 왕묘와 부장품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화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유물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불거진 이유는 나쁜 선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고고학자 루드비히 보르카르트 Ludwig Borchardt (1863~1938)가 1912년 텔 엘-아마르나 Tell el-Amarna 에서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 Amenhotep IV/Akhenaten (재위 기원전 1352~1336)의 왕실 조각가 투트모세 Thutmose 공방에서 네페르티티 Nefertiti 왕비 흉상을 발견한 후 이를 독일로 반입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후 유물의 국외 유출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반감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아울러 민족주의자로 활동하면서 영국 당국에 의해 4년 간 투옥된 경력이 있던 당시 이집트 공공사업 장관 Minister of Public Works이자 반영주의자 모르코스 베이 한나 Morcos Bey Hanna 는 이집트 파라오 분묘가 영국인에 의해 발굴되는 데 공공연하게 불만을 표시했으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카터 발굴 작업을 여러 차례 중단하려 했습니다.
카터 역시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라코, 그리고 베이 한나와의 불화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끝없이 몰려드는 방문객을 처리하는 문제와 유물 소유권을 두고 전개된 카터와 이집트 정부 사이 갈등은 결국 왕묘 폐쇄라는 극단적인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각주: 1912년 12월 6일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이 처녀지에 건설한 수도 텔 엘-아마르나 교외 지역 남부에 위치한 조각가 투트모세 공방에서 20여 점 석고 모형과 조각상이 보르카르트가 이끄는 독일근동학회 Deutsche Orient-Gesellschaft 발굴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이들 조형물 중 으뜸은 단연 현재 베를린신박물관 Neues Museum 이 소장한 네페르티티 흉상 Nefertiti Bust 입니다.
발굴 후 한 달 뒤 이집트와 독일 간 유물분배 과정에서 네페르티티 흉상은 독일근동학회를 후원한 고미술품 수집가 제임스 시몬 James Simon (1851~1932)한테 인도되었고 시몬 박사는 1920년 이 흉상을 신박물관 전신인 베를린 국립박물관 Staatliche Museen zu Berlin 에 기증했습니다.
3년 후 이 흉상이 대중에게 공개되자 이집트 정부는 발굴팀이 유물분배 과정에서 흉상에 진흙 등을 붙여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없도록 하는 속임수를 써서 독일로 반출했다고 주장하면서 유물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세계대전 발발 등으로 유물 반환은 유야무야 되었습니다만 이집트 정부는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네페르티티 흉상 반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지나친 관심 또한 유물의 차분한 정리와 발굴을 방해하는 심각한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1922년 투탕카멘 왕묘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헤드라인 기사로 세계에 타전된 이후 카터에게는 각국 고고학자와 이집트학자, 언론인과 일반 관광객의 각종 문의와 제의가 답지했으며 매일같이 수많은 관광객이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여기에는 유명인사도 여럿 포함되었는데 당시 어린 이집트 국왕 파루크 1세 Farouk I (1920~1965년) 와 벨기에 엘리사베스 여왕 Queen Elisabeth Gabriele Valérie Marie of Bavaria (1876~1965)은 투탕카멘 왕묘 묘실이 개방되었을 때 이를 참관한 대표 인물입니다.
각국 귀족을 비롯한 고위인사들이 방문하면 이들에게 현장을 안내하는 임무를 맡아야 했던 카터는 현장조사에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과 함께 방문객 부주의로 유물이 파손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카나본 경에게 끊임 없이 주지해야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상류층과의 회합과 교섭·리셉션과 같은 대외업무는 카나본 경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카나본 경은 또한 「타임즈」 The Times와 독점 보도권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모닝 포스트」 The Morning Post·「뉴욕 타임즈」 The New York Times 와 같은 경쟁 언론사들을 적으로 돌아서게 만든 결정적인 패착이었음이 곧 분명해졌습니다.
#투탕카멘 #하워드카터 #왕가의계곡 #카나본경
*** 편집자注 ***
관련 도판과 그에 대한 설명은 모두 편집자에 의한 것이다. 이 부문은 본문 집필자인 유성환 박사는 책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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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4) 하워드 카터와 카나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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