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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6) 파라오의 저주?

by taeshik.kim 2022.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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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theunredacted.com/tutankhamun-curse-of-the-mummy/



왕묘가 발견된 후 몇 주 뒤 영국의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Fifth Earl of Carnarvon: 1866-1923년) 경은 면도를 하다 모기에 물린 부분을 잘못 건드렸는데 이때 그만 상처가 덧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부분에 심각한 염증이 생겨 1923년 4월 5일 결국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패혈증에 의한 폐렴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사건에 언제나 목말라하던 언론에 의해 ‘파라오의 저주’(curse of the pharaohs)라는 해묵은 미신이 또다시 기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카나본 경이 사망한 날 “카이로 시내가 정전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사망한 바로 그 시각에 카이로에서 약 4,800킬로미터 떨어진 영국의 하이클레어 성(Highclere Castle)에 있던 그의 애견 수지(Susie)가 길게 울부짖은 후 죽었다”는 이야기 등이 호사가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 시내 정전은 20세기 초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카이로는 6기의 발전기로부터 전기를 공급받고 있었는데 카나본 경이 사망한 날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가 작동을 멈추긴 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에서 정전은 굉장히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카나본 경의 죽음과 정전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투탕카멘 관뚜컹을 연 하워드 카터



다음으로 카나본 경 애견이 슬프게 울부짖었다는 이야기는 카나본 경 아들인 제6대 카나본 백작 헨리 허버트(Henry Herbert, Sixth Earl of Carnarvon: 1898-1987년) 경이 퍼뜨린 것입니다.

카나본 경은 현지 시각으로 오전 1시 55분 사망했는데 이때 시차가 2시간인 영국은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지가 사망한 것은 오전 4시경입니다.

반려견 사망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이야기는 그 진위 차체가 의심스럽습니다.

수천 년 간 안식을 방해 받은 ‘분노한 파라오의 치명적인 저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투탕카멘(Tutankhamun: 기원전 1336-1327년) 왕묘 발굴작업에 참여한 사람들 혹은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년)와 연관된 학자들에게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람세스 1세 미라



투탕카멘 엑스레이 촬영을 기획한 방사선 전문의 아치볼드 레이드(Archibald Douglas Reid: 1871-1924년) 경이 1924년, 카터 팀 보존 전문가 아서 메이스(Arthur Cruttenden Mace: 1874-1928년)가 1928년, 카터 비서로 활동한 리처드 베셀(Richard Bethell, Third Baron Westbury: 1852-1930년) 경이 1930년, 카터 뒤를 이어 유물 총괄 감독관에 임명된 아서 웨이걸(Arthur Weigall: 1880-1934년)이 1934년 각각 사망했는데 언론들은 이들 모두 파라오의 저주 희생자라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치볼드 레이드는 엑스레이를 다루던 다른 초기 방사선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에 방사선 피폭에 의해 유발된 피부염을 앓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를 치료하기 위한 수술 직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서 메이스는 왕묘 발굴작업에 참여하기 전부터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당시에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던 흉막염을 앓고 있었습니다.

리처드 베셀 경은 자기 침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는데 사인은 질식으로 추정됩니다.

이집트학자 아서 웨이걸은 ‘원인 모를 열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베셀이나 웨이걸과 같이 사인이 미심쩍은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이 파라오의 저주라고 확정할 수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파라오의 저주’를 가장 확실하게 반박할 수 있는 근거는 왕묘 발견과 미라 부검 등으로 투탕카멘 휴식을 방해하는 데 그 누구보다 앞장선 두 인물은 오히려 천수를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왕묘 발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카터의 경우 왕묘를 발견한 후 16년이나 지난 1939년 노환으로 사망했으며 투탕카멘 미라를 부검하고, 그리하여 고대 이집트인들이 영생 조건 중 하나로 그렇게 중시한 신체의 완전성을 훼손한 더글러스 데리(Douglas Derry: 1874-1961년) 박사 역시 8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파라오의 저주 이야기를 선호했습니다.

특히 셜록 홈즈(Sherlock Holmes)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년)은 신관들이 투탕카멘의 왕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신비스러운 힘이 카나본 경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주범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저주와 관련된 괴담이 널리 유포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성행한 고딕 소설 역시 당시 파라오의 저주와 관련된 근거 없는 소문, 특히 붕대를 늘어뜨리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면서 무덤에 침입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미라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퍼뜨리는 데 일조했습니다.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년)의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가 1818년 출간된 것을 필두로, 신왕국시대 제20 왕조 람세스 3세(Ramesses III: 기원전 1184-1153) 미라를 비롯한 여타 왕실 미라 사진이 유럽에 공개되자 이에 영감을 받은 제인 웹(Jane Wells Webb Loudon: 1807-1857년)의 『미라! 23세기 이야기』(Mummy! A Tale of Twenty-Third Century)가 1827년 출간되면서 소위 ‘미라 장르’(mummy genre) 작품이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879년에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년)의 소설 『드라큘라』(Dracula)가 발표되면서 호러 장르의 고전적 캐릭터 삼인방이라 할 수 있는 프랑켄슈타인 • 드라큘라 • 미라의 조합이 완성됩니다.

한편 미라 호러물의 경우, 독일 감독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 1892-1947년)가 1918년 발표한 무성영화 「미라 마의 눈」(Die Augen der Mumie Ma)과 1932년 개봉한 보리스 칼로프(Boris Karloff: 1887-1969년)의 고전 호러 명작 「미라」(The Mummy)가 이후 수많은 속편과 시리즈, 리메이크 작품에 영감을 주면서 미라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여담으로, 파라오의 저주는 한편으로는 예상치 않은 다른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파라오의 저주와 관련한 소문과 기사가 퍼지기 시작하자 이런저런 경로로 미라를 소유한 수많은 유럽 개인 수집가가 미라를 박물관에 기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라가 알 수 없는 병을 유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유럽 박물관이 상당한 미라를 소장하게 되었으며 대중이 미라를 비롯한 이집트 여러 유물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파라오의 저주와 관련된 도시전설은 투탕카멘 왕묘와 관련한 괴담이 처음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기회만 되면 부활했습니다:

“1966년 꿈에서 이집트 보물을 외부로 유출하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계시를 받은 유물관리 국장 모함메드 이브라힘(Mohammed Ibrahim)은 투탕카멘 유물과 미라를 프랑스에 대여하기로 한 박물관 방침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최종 회의에서 결국 프랑스로의 대여가 결정되자 그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고 얼마 뒤 택시에 치여 즉사했다(교통 사고가 난 지 이틀 뒤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꿈 속의 계시가 실현된 것이다.”

진위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이 이야기에서 모함메드 이브라힘은 이집트 문화유산이 외부로 반출되는 것을 극구 반대한 인물입니다.

만일 투탕카멘이 누군가를 죽음으로 징벌해야 했다면 왜 유물 반출을 적극 추진한 사람들이 아닌 모함메드 이브라힘과 같은 자기 편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했을까요?

아무튼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파라오의 저주는 파라오의 명성이 유지되는 한 앞으로도 끊임없이 유포되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투탕카멘 #하워드카터 #카나본경 #미라의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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