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7) 본격화하는 발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2. 15.
반응형

하워드 카터(오)와 카나본경(왼), 그리고 그의 부인 에벌린(가)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Fifth Earl of Carnarvon: 1866-1923년) 경이 1923년 4월 5일 사망하기 약 한 달 전인 2월 28일에는 투탕카멘(Tutankhamun: 기원전 1336-1327년) 왕묘(KV 62)의 묘실(burial chamber)이 마침내 개방되었습니다.

왕묘가 발견되고 발굴팀이 꾸려지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년)는 1922년 12월 27일부터 전실(antechamber)의 유물을 수습하여 카이로의 박물관으로 보내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유물이 왕묘 밖으로 운반되면 람세스 11세(Ramesses XI: 기원전 1099-1069년)의 왕묘(KV 6)에 임시로 보관되었다가 옮겨졌는데 나중에는 세티 2세(Sety II: 기원전 1200-1194년)의 왕묘(KV 15)가 임시 보관소 역할과 함께 ‘작업실’(lab)과 스튜디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투탕카멘 왕묘 맞은편에 자리한 55번 왕묘(KV 55)는 발굴팀 전속 사진사 해리 버튼(Harry Burton: 1879-1940년)의 암실(darkroom)로 활용되었습니다.

카터는 모든 유물에 고유번호를 붙여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발굴 과정 전체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카터와 같은 소명의식과 유물과 발굴작업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 의해 왕묘가 발견되었더라면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유물들만 선별하여 운반한 후 바로 전시회를 열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크기, 소재, 완성도 등에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유물과 소품들은 영원히 소실되거나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하워드 카터



이런 식의 "발굴" 작업은 한 달 정도면 가능했을 테지만 타협을 몰랐던 카터가 왕묘 발굴작업을 마치는 데에는 무려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원칙에 철저했던 카터는 유물이 발견된 곳에서 반드시 현장사진을 찍게 했습니다.

각 유물에 대해서는 고유번호가 기입된 카드와 함께 (혹은 카드가 없는 상태에서) 각도를 달리한 사진을 적어도 한 장 이상 찍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세운 원칙이었습니다.

또한 카터는 유물 내역과 세부묘사를 카드에 기록했으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자신이 혹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보존전문가 아서 메이스(Arthur Cruttenden Mace: 1874-1928년)가 스케치를 그렸습니다(카터가 원래 기록화가로서 이집트에 첫 발을 디뎠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속 건축가 월터 하우저(Walter Hauser: 1893-1959년)와 린슬리 홀(Linsley Foote Hall: 1883-1969년)이 작성한 왕묘 평면도에 유물이 발견된 위치를 정확하게 표기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물이 투탕카멘 왕묘 밖으로 옮겨지면 세티 2세의 왕묘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존 전문가 알프레드 루커스(Alfred Lucas: 1867-1945년)와 메이스가 해당 유물 보존에 필요한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며 이어 기록사진이 다시 촬영되었습니다.

카터가 발굴을 지휘하는 동안 수천 점에 달하는 유물이 모두 이런 과정을 예외 없이 거쳐야 했습니다.

발굴작업은 1년 내내 진행되었는데 발굴팀 전문가들과 이들에 의해 고용된 현지 일꾼들은 때때로 섭씨 29도 열기와 뙤약볕 속에서도 그늘이나 가림막이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작업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지난한 작업에 더하여 카터와 발굴팀은 끊임 없이 현장으로 몰려드는 구경꾼들과 기자들, 그리고 이집트 정부관리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일례로, 1926년 1월 1일에서 3월 15일 사이에 현장을 방문한 사람만 1만2천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일단 왕묘 밖으로 옮긴 유물을 카이로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옮기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제작된 보존용 나무상자에 담긴 유물들은 철도를 통해 강으로 운반되었는데 이를 위해 이집트 고고학청(Department of Antiquities)은 프랑스 공업용 철로 제조회사인 데코빌(Decauville)에서 제작한 경량 협궤철로를 제공했습니다.

한편, 철도운송에는 덮개가 없는 무개(無蓋) 화차가 사용되었는데 별도 기관차 없이 인부들이 화차를 손으로 밀어 운반했으며 철로 또한 부족했기 때문에 화차가 이동하면 뒤 철로를 떼어 앞으로 연결하는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거리 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은 왕가의 계곡에서 강변 부두까지 유물을 운반하는 데 장장 15시간 이상이 소요되었습니다(아래 사진 참조).

이렇게 강변의 부두로 옮겨진 유물들은 배에 실려 카이로까지 운반되었습니다. (예외적으로 투탕카멘 황금관과 황금가면을 비롯한 극소수 유물만이 무장 군인들이 호위하는 특별 업무용 차량을 통해 박물관 앞마당까지 바로 운송되었습니다.)

엄격한 원칙과 열악한 작업환경, 그리고 일반 대중의 관심과 취재경쟁 등의 악조건 속에서 카터와 그의 발굴팀이 전실을 정리하는 데에만 7주가 소요되었습니다.

그런데 묘실이 개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터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카나본 경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해버린 것입니다.

이제 카터는 발굴작업뿐만 아니라 언론과 유명인사들을 상대해야 하는 대외업무도 함께 수행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카나본 경이 사망한 후 유물 발굴권과 소유권에 대한 이집트 정부와의 분쟁 역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고집불통에 격정적인 성격으로 인해 적이 많았던 카터의 입장에서 카나본 경은 정말 최악의 시점에 그의 곁을 떠나버린 것이었습니다.



보존용 상자에 실린 유물들이 협궤철로를 따라 강으로 운반되는 모습 사진 출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2/Burton_Tutankhamun_tomb_photographs_1_016.jpg



*** previous article ***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6) 파라오의 저주?

 

 

[유성환의 이집트 이야기]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6) 파라오의 저주?

왕묘가 발견된 후 몇 주 뒤 영국의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Fifth Earl of Carnarvon: 1866-1923년) 경은 면도를 하다 모기에 물린 부분을 잘못 건드렸는데 이때 그만

historylibrary.net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