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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송은의 뮤지엄톡톡

은행나무 아래, 온주와 대식오라버니(최종회)

by 여송은 2019.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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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란 은행잎이 비단처럼 곱습니다. 온주는 애꿎은 햇님만 계속 노려봅니다.

햇님은 붉은 이마만 산 중턱에 남기고,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려 합니다.

저 멀리서 오랜만이지만 낯익은 그림자가 보입니다. 소 등에 작은 산을 이고 걸어오는 대식오라버니입니다. 어숨푸레 대식오라버니가 나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눈 앞에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온주는 마음이 다시 노란 물결로 일렁입니다.

 

"산에 나무하고 돌아오는데, 마침 시간이 맞아 들렀습니다. 기다리실 것 같기도 하고..."

"고마워요. 오라버니. 저..."

"알고있습니다. 시집...가신다면서요. 양주로..."

"아...알고있었네요. 네...저 시집가요."

 

"......"

 

"오라버니...저한테 뭐..해줄말 없으신가요?"

 

"......"
"아가씨, 축하드려요. 부디 몸 건강하시고요..."

 

온주는 물끄러미 대식오라버니 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다부진 눈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노란 물결로 일렁입니다.

 

"거짓부렁쟁이..."

 

온주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곤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시집가겠다는 온주의 마음이 서자, 혼인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몇 번의 서신과 예물함이 최참판댁 문턱을 넘더니 온주가 시집을 간다고 합니다.

 

예물함禮物函  소나무, 주칠 

신랑 집에서 혼서婚書와 혼수婚需를 담아 신부 집에 보내는 함으로 ‘봉치함’이라고도 한다. 뒤판 경첩에는 예물함을 의미하는 ‘男子남자’, ‘壽福수복’, ‘貴富귀부’ 자가 새겨져 있다. 둥근 자물쇠 바탕과 그 아래 박쥐 모양의 들쇠 바탕, 그리고 칠보 감잡이의 금속장식으로 균형있게 장식하였다.

 

온양 제일 큰집, 최참판댁 외동딸이 시집을 간다기에 온동네가 들썩입니다. 참판댁 하인들은 음식준비에 혼례 준비에 정신이 없으면서도 연신 싱글벙글입니다. 마당 안은 혼례를 축하해 주러 온 이들로 북적이고 왁자지껄합니다. 그 와중에 당사자인 온주만 시종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곤 고요합니다. 가끔씩 누구를 찾는 듯이 고개만 두리번 거릴 뿐입니다.

 

"어유, 시집가는 신부 표정이 왜이렇게 어두워~~!"

"에에~~시집간다고 싱글벙글 웃는 것보다야 낫지 뭘그래~! 곱네 고와!"

 

주책맞게 떠드는 아낙들을 뒤로하고, 대식이는 먼 발치서 온주를 바라보았습니다.

고운 댕기를 늘어뜨리고, 혼례복을 입은 온주를 바라보는 대식이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연지곤지를 찍은 온주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렇게 온주는 시집을 갔습니다.

 

금박댕기金箔唐只  비단, 금박

신부의 혼례용 머리장식으로, 쪽 찐 머리에 덮어 늘어뜨리는 댕기이다. 상서로운 새인 봉황과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등 길상무늬와 문자를 금박으로 찍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화면구성 상 유물 이미지를 뒤집음)

 

 

단풍이 지고, 햐안 눈이 소복히 쌓이고, 다시 들판에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고... 그렇게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만큼 온주도 시집 생활에 녹아들려고 부단히 애를 썼고, 차츰 차츰 적응했습니다. 신랑된 사람은 품성이 바르고, 다른사람에게도 온주에게도 늘 예의있게 대해주었습니다. 다음 해에 있을 과거 준비로 서안에 앉아 늘 책을 보았고, 가끔씩 머리를 식힐 때면 온주와 함께 강변을 따라 걸었습니다. 

 

어느날, 온주는 어머님을 따라 불공을 드리러 용문산에 있는 절에 올랐습니다. 뒷산에 큰 절이 있다고 얼핏 이야기만 들었지 가 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가을, 코 끝에 닿는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청량했습니다.  그렇게 불공을 드리고 나오는데,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새벽에는 어두워 보지 못했던 걸까요.

 

용문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로, 높이 42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14m로 수령은 1,100년으로 추정된다. 은행나무 중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로, 조선 세종 때 당상직첩 벼슬이 내려졌다 하며, 마을에서는 굉장히 신령시하여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용문사'라는 절 만큼이나 유명한 '용문사 은행나무'이다. (출처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몇 겁의 세월을 견딘듯한 그 은행나무는 아무일 없다는 듯 고요히 아침햇살을 맞고 있었습니다.

바닥은 온통 노란빛으로 일렁였고, 온주는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아가, 아가! 넋놓고 뭐하니. 내려가자."

"아..?! 네..."

 

 

노란 은행나무를 보고 있자니, 그 다부진 눈속에 있던 고향 은행나무가 생각 났습니다.

온주는 고운 시전지를 꺼내, 대식오라버니에게 한글로 서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전지, 시전지판詩箋紙, 詩箋紙版  물푸레나무, 은행나무, 한지

시나 글을 적기 위한 시전지와 시전지를 찍기 위한 판으로 조선시대 문인, 학자들이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사용하였다. 시전지판은 사용하는이의 취향에 따라 꽃, 나무, 새, 난초 등으로 도안하였다. 여성들은 왠지 꽃과 새가 노닐고 있는 도안을 사용하였을 듯 하다.

 

 

「오라버니, 강녕하신가요? 

우리 고향 언덕 은행나무도 노랗게 물들었겠지요?  

...... 」

 

 

그렇게 온주는 몇 번인가, 하인을 시켜 몰래 대식오라버니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서신을 잘 받았는지 퍽 궁금하였지만 잘 받았겠거니, 농사일로 바빠 못보냈겠거니 하며 위안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시 한 해가 지나 신랑은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떠났습니다. 남한강을 따라 두물머리를 지나면, 걸어서 가는 것 보다 곱절은 빨리 한양에 도착 할 수 있기에 배에 올랐습니다. 

 

온주는 다시 어머님을 따라 절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치르러간 서방님을 위해 불공을 드렸습니다. 며칠, 몇 주일이 지나고, 두 달즘 되었을까요. 급하게 누군가 서신을 들고 왔습니다. 온주는 잊고있던 고향 은행나무가 떠올랐고, 버선발로 나가 서신을 받아 보았습니다.

 

온주는 서신을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과거시험을 치르고 배를 타고 양주로 오던 중 두물머리에서 물살에 휩쓸려 배가 뒤집어 졌다는 겁니다. 온주는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졌습니다. 집안에 난리가 났고, 사람을 풀어 두물머리를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시부모님도 이제 포기를 하였습니다. 집안에서는 상 치를 준비를 하였고, 온주도 사랑방에 들어가 살아 있을 때 사용하던 서방님 물건을 정리 하였습니다. 

늘 정갈하게 책을 펴서 보던 서안이며, 자주쓰던 붓과 필통, 한 켠에 단정하게 서신이 꽂혀 있던 고비. 주인만 없고, 손 때묻은 물건은 모두 그대로 입니다.  

 

 

서안書案  느티나무

서안은 주로 글을 읽거나 쓸때, 앉아서 사용하던 책상이다. 이 서안은 몸체와 천판을 날렵하고 길게 만들었으며, 서랍이 없이 몸체 중앙에 가는 판을 하나 대어 공간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여 준다.



 

필통筆筒  대나무

높고 낮은 세 개의 대나무를 이어 붙인 필통으로, 일명 ‘형제필통’이라고 한다. 겉면에 상서로운 의미를 담은 장생과 화조무늬를 양각하였다.

 

 

고비考備  은행나무, 대나무

편지나, 두루마리, 종이 등 각종 문서를 꽂아두는 보관함으로 방이나 마루에 걸어두고 사용하였다. 이 고비는 중앙에 ‘卍만’자를 투각하고 양옆에 대나무를 조각한 기둥을 세워 견고하게 만들었다.


 

고비에 걸려 있던 서신을 정리하던 중 낯익은 시전지 뭉치를 보았습니다. 바로 온주가 대식오라버니에게 보낸 서신이었습니다. 온주가 보냈던 서신들은 어찌 모두 이 방에 와있을까요. 온주는 떨리는 손으로 자기가 쓴 서신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그리곤 가장 아래 서방님이 온주에게  쓴 듯한 글이 있었습니다.

 

「온주, 이름도 고운 당신에게.

늘 다른 곳을 보는 듯 했소. 혼례를 치르는 날도 그랬고, 내 옆에 있으면서도 말이오.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소. 고향에 두고 온 그리운 은행나무때문이지요. 어느날, 하인이 급하게 뭔가를 들고 나가더군요. 그게 무엇이냐 물으니 쭈볏쭈볏 대답을 못하더이다. 그래서 내가 다그치니 소맷자락에서 꺼내 보여주는게 당신의 서신이더군. 그 뒤로 당신의 서신은 나에게 가져오라고 일렀소.

내가 당신의 서신을 보고 화가 나지 않았던건 아니었소. 뜨거운 것이 마음 속에서 일렁이었지만, 그대로 꿀꺽 삼켰소.

왜냐면 난 당신이 좋았소. 처음부터 당신은 나를 보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 당신을 보았소. 기다렸소. 그리고 앞으로도 기다릴 것이오. 그럼 그때는 나를 볼 거라 믿소.

내 과거 보고 돌아오면 날 좋은날, 당신 좋아하는 은행나무 보러 고향에 같이 가기로 하오. 조금만 기다리시오. 나도 우리 서로 마주보며 웃는 날을 기다리겠소.」

 

 

온주는 그자리에서 한참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온주는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사십구재가 지나고, 온주의 배는 조금씩 불러왔습니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몇 번을 물들고 지기를 반복했을까요. 온주네 고향 언덕 은행나무가 몇 번을 물들고 지기를 반복했을까요.

 

 

"엄마~~이것좀 보셔요. 바닥이 온통 노란색이여요! 제 발 도 노랗게 물들 것 같아요."

 

"그렇네, 나무도 노란빛도 모두 그대로이네."

 

온주를 똑닮은 아이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종알입니다.

 

 

"엄마~~! 저기봐요~~! 햇님 이마만 남았어요! 여기서 보니깐 잘보여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우리 어두워 지기 전에 내려갈까? 위험해요."

 

"네~~! 어? 그런데 저기 누구 온다."

 

 

정말 오랜만이지만, 낯익은 그림자가 어슴푸레 보입니다. 소 등에 작은 산을 이고, 그 옆을 한 사람이 묵묵히 걷고있습니다.

 

"대식오라버니..."

 

노오란 은행잎이 가을바람에 일렁입니다.  


은행나무 아래, 온주와 대식오라버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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