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타 한·수해 구제
조선에서 한해와 수해는 거의 매년 일어나서 일일이 거론하려면 한이 없는데 1919년의 한해에 이어 특별히 기록해야 할 것은 1924년(大正8)의 한·수해와 1925년(대정9)의 대수해다.
1924년(대정8)은 갑자년甲子年으로, 조선의 미신에 따라 일반의 무지한 인민 사이에 연초부터 인심이 흉흉했다. 그런데 모내기철이 되어 쌀 산지인 남선南鮮 지방에 대한해가 일어났고 모내기를 할 수 없는 논은 전남 전북 경북 경남 충남의 여러 도에 걸쳐 약 26만 1천 정보에 달했으며, 약 300만 석이 감수減收할 것으로 예상되어[520] 남선 일대의 인심은 날로 험악해져 갔다.
이에 총독부를 비롯해 도 당국에서는 최선으로 그 대책을 강구했다. 전남도청의 경우는 솔선해서 이들 재해지의 대용작代用作으로, 메밀·피·조의 종자 약 8,000석을 만주에 주문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행히도 7월 중순부터 단비가 쏟아져 관민 모두 인심을 덜었다.
하지만 이 비가 호우로 변해, 경기도를 비롯한 서선西鮮 일대의 크고 작은 하천이 범람하고 교통 두절·논 매몰·가옥 침수·인축人畜 피해가 많은 수에 달했다.
이에 총독부는 은사이재구조기금恩賜罹災救助基金에서 구제비를 지출하는 외에, 국비 375만 원을 지출해 구제에 충당했다. 그 대책과 방법은 대체로 1919년(대정 8)의 경우와 대동소이하기에 거듭 말하지 않겠다.
1925년(대정 14) 7~8월의 대수해는 60년 만의 대재해였다. 남부의 낙동강 범람부터 중부의 한강 홍수를 비롯해, 함북 일부를 제외한 조선 전 지역에 재해의 피해가 미쳤다.
범람 면적은 약 16만 정보에 달했으며 사망자 647명을 냈고 유실 가옥은 1만 호를 헤아렸으며, 푸른 논이 진흙탕으로 변했고 피해 총액은 1억 300여 만 원이란 거액에 달했다.
따라서 총독부는 은사이재구조기금에서 13만 4,710원을 지출하고, 또한 일반에서도 약 70만 원의 의연금을 모금해 이재민의 응급 구조를 수행했다.
이 외에 국비 450만 원을 들여 재해복구공사를 일으켜 임금 지급을 통해 이재민을 구조하고자 했는데, 그 방법은 1919년(대정8) 한해의 경우와 거의 동일하므로 이 또한 설명을 생략하겠다. (489쪽) (제3기 사이토 충독 시대)
***
이상은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 김민석, 최은진, 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에 의거한다.
[숫자]는 원서 쪽수이며 붉은 숫자는 번역본 쪽수다.
상·중·하 세 책인 이 번역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시정25년사』와 『시정30년사』를 번역하고 각주를 붙인 것이다.
개중 상·중 두 권이 시정25년사이며, 마지막 하가 시정30년사다.
시정30년사 전반부는 시정25년사와 겹치는 까닭에 이 겹치는 부분은 번역에서 제외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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