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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조선미술전람회와 조선총독부박물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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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문화적 시설

조선 고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만약 채용해야 할 것이 있다면 채용해서 통치에 도움이 되도록 한디는 것은 제3기 시정의 한 방침이었다.

1) 개설
총독부에서 시행한 문화적 사업은 종래부터 이어진 박물관, 고적 조사, 고적조사보 고서 및 고적도보 출판, 조선인명휘고彙考 편찬 등이 있었다.

또한 제3기에 들어 경성제국대학이 설치되자, 경성제국대학 내에서 조선 고문서의 수집, 무격의 조사, 조선 토속품 수집 등의 사업이 시행되었다.

제3기에 총독부에서 직접 착수한 사업은 다음과 같다.

2) 구관舊慣 및 제도 조사
총독부에서는 종래 중추원의 부대사업으로 구관 및 제도의 조사를 시행하여, 이를 입법 자료와 재판의 준칙으로 삼고 정무에 참고해 왔다.

이를 확충해 시정에 한층 더 효과적일 수 있도록 1921년(대정 10) 4월 새로이 '구관 및 제도 조사 위원회'를 만들어, 내선인 민간위원 수 명을 특별히 선임했다.

그리고 수시로 위원회를 개최하고 조사 결정하며, 이를 각 국·부에 회부해 참고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하지만 행정 정리 결과 각종 위원회가 감소·폐지되어, 이 위원회 또한 1921년(대정 13)에 결국 폐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조사는 여전히 중추원에서 실행하고 있다. (이상 497쪽) (제3기 사이토 총독 시대)



조선미술전람회



3) 조선미술전람회
조선에서 미술은 옛날에 꽤 발달한 시대가 있었지만, 조선 중엽 이후 현저히 쇠퇴해 근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미술로 주목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고적의 발굴품과 몇몇 전세품傳世品으로 옛날을 회상하는 데 지나지 않는 상황이었다.[530]

따라서 차제에 조선 미술의 부흥을 도모하는 것은 황폐해진 인심을 만회하고 문화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인정해, 1922년(대정11) 1월 '조선미술전람회규정'을 발포하고 매년 1회씩 개최했다.

이 전람회는 제1부(동양화)·제2부(서양화 및 조각)·제3부(書와 사군자)의 3부품로 구별하고, 개최할 때마다 심사위원을 내지에서 각각 그 방면의 대가 가운데 촉탁했다.

신중한 심사를 거쳐 입선한 서화 등은 진열해서 일반이 관람할 수 있게 하고, 그중 우수작에는 상패 또는 상장을 수여했다.

해당 시설이 얼마나 조선에 있는 내선인의 생활에 윤택과 빛과 기쁨을 주었는가는, 출품과 입선 작품 수가 매년 증가했으며그 기공이 매년 현저하게 향상된 점에서 분명하다.

아래에 이를 표로 나타낸다. 




 
(이상 498쪽



4) 조선사 편수
1916년(大正 5) 일찍이 중추원에서 반도사를 편찬했지만, 별도로 한충 더 상세하고 또 완전한 조선사 편찬이 필요하다고 보았다.[531]

이에 따라 1922년(대정 11) 12월 총독부 훈령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을 발포하고, 다음 해인 1923년(대정 12) 1월 조선역사에 조예가 깊은 내선 학자를 위원으로 선정했다. 이것이 조선사 편수사업의 발단이다.

대저 조선의 문화는 그 연원이 매우 요원하고 우월한 점이 적지 않은데, 학술적 견지에서 자료를 모집·편찬한 역사 기록은 주목할 만한 것이 없었다.

또한 고기록·고문서, 기타 사료라고 할 만한 문헌류가 해마다 계속해서 인멸되고 있었기에, 아무런 시설이 없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있다.

이 사업이 기획된 것은 실로 이러한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위원이 결정되자 제1회 위원회를 개최하여 조선사의 편찬 및 사료 수집 방법, 기타에 대해 심의를 마쳤으며, 동시에 편찬 및 채방採訪에 착수해 이렇게 수집한 사료는 학자들에게 전람되었다.

조선사의 편수는 당초 계획으로는 1922년(대정11)부터 향후 10년간 완성할 예정이었는데, 1923년(대정 12) 관동대진재에 따른 재정상의 사정으로 2년 더 사업 기간을 연장했다.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충 권위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아 1925년(대정14) 6월 6일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고 곧바로 고문·위원·간사 및 수사관 이하를 임명했다.

그해 10월 제1회 고문·위원회를 개최하여, 종래의 위원회의 계획을 이어 다시 편찬 방법 등을 심의했다.

1927년(소화 2) 7월에는 제2회 회의를 열어 '조선사 고본稿本' 편찬 강령 및 범례 등의 구체적인 방법을 심의했다.

1929년(昭和 4) 12월에는 제3회 회의를 개최해 조선사 인쇄 계획을 협의·결정했다.

또한 이에 따라 종래의 예정 연한에 다시 1개년을 더해 1934년(소화9)에 편수와 인쇄를 완료하기로 했다.

이처럼 한편으로 편찬의 진척을 도모하며, 이와 동시에 종래 가장 어려운 일로 여겨져 온 지방 사료의 채방을 시작했다. [532]

지방의 구가舊家·장서가 등이 모두 이 사업의 취지를 이해해서 의외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지방 일반 채방은 1929년(소화 4)에 각 도와 만주에 걸쳐 대개 종료했다. (이상 499쪽






5) 총독부박물관 분관
신라의 옛 도읍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남선南鮮의 사적·유물은 근래 내외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바가 되었다.

특히 경주의 불교예술을 채방하는 자가 해마다 늘어 가는 상태여서, 이 지역에 총독부박물관 분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음을 통감하게 되었다.

마침 1921년(大正 10) 한 촌민村民에 의해 경주 노서리路西里의 한 고분에서 금관·금귀고리, 기타 순금 대帶, 금구金具 등이 발굴되었다.

이후 이 지역의 고분 유물에 대한 보존열이 갑자기 높아져, 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는 이 지역 유지의 기부로 만든 견고한 진열관을 총독부에 기부했다.

이에 따라 1926년(大正 15) 경주에 총독부박물관 분관을 세우고, 그 진열품은 주로 금관총 및 기타 발굴 수집품, 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와 개인의 기탁품으로 채웠다.

삼국시대 신라·임나·백제·통일신라시대의 유물·예술품을 진열하기로 하여, 그해 6월 20일부터 개관했다. (이상 500쪽



공진회에 등장한 지광국사현묘탑



 
4) 경주 노서리 고분은 1921년 우연히 유물층이 노출되어 수습·조사되었다. 최초로 금관과 금제과대를 비롯한 각종 호화유물이 출토되면서, 경주와 신라 고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이고분군은 황남대총과 함께 경주 시내 고분군 가운데 최대형 고분에 속한다. (국역 조선총독부30년사_ 상권(1~3기1)

 
*** 
 
이상은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 김민석, 최은진, 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에 의거한다.

[숫자]는 원서 쪽수이며 붉은 숫자는 번역본 쪽수다.

상·중·하 세 책인 이 번역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시정25년사』와 『시정30년사』를 번역하고 각주를 붙인 것이다. 

개중 상·중 두 권이 시정25년사이며, 마지막 하가 시정30년사다. 시정30년사 전반부는 시정25년사와 겹치는 까닭에 이 겹치는 부분은 번역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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