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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조선총독부 시정25년사가 말하는 조선물산공진회

by taeshik.kim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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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회에 몰려든 이 인파를 관제동원 한 마디로 설명하는 놈들이 한국역사학이다. 저 드글드글하는 욕망이 안 보이니?



9. 시청 5년 기념 공진희 개설


1) 개설
박람회, 전람회, 기타 유사한 시설은 예전 한국에는 전혀 없있다. 따라서 그것은 1907년(명치 40) 한일 양국의 유지有志들이 발기하여 개최한 경성박람회가 효시이다. 이 박람회는 명의상으로는 한일 유지들이 주최하였지만, 통감부는 물론 한국정부도 상당한 원조를 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한일 관민 합동 사업과 다름없었다.

경성박람회는 1907년 9월  1일부터 11월 15일에 이르는 2개월 반 동안 개설되었는데, 단지 조선 내에서만이 아니라 내지의 각 부. 현 및 훗카이도·대만에서도 출품하여 그 수가 [120] 총 7만 9천여 점에 달하였고, 관람인은 총 20만 8,000여 명에 이르러 당시로서는 상당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 무렵에는 일반적으로 한국 부인이 남자와 함께 외출하는 것과 같은 습관이 었었기 때문에, 위 기간 중 특별히 '부인 데이day'를 3회 마련하여 부인의 지식 개발에 힘쓰는 등 지금과는 크게 사정이 달랐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공진회 포스터



그런데 지금은 총독부 시정 이후 5년을 경과하며 제반 시설이 순조롭게 효과를 거두어, 고단했던 민중들은 각각 편안하게 살아가고 빈약하고 볼 만한 것이 없던 산업도 번성하여 경향에서 흥기하였다. 또 고같되었던 반도의 산하도 다시 생기를 회복하여 예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발전한 반도의 유 .무형의 현상을 내외에 자(이상 120쪽)세히 알리고, 동시에 이 성과를 정밀하게 조사해 그 부족한 점을 확인함으로써 장래에 해야 할 사업에서 제2의 출발점으로 삼기 위해 시정 이후 제1회 공진회가 계획되었던 것이다.

이 사업은 실로 반도에서는 창시적創始的인 것이있고, 또 데라우치 총독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일대 사업이었다. 이름은 물산공진회였지만 그 내실은 총독 자신이 말한 것처럼 "산업과 기타 제반 문물의 시설·사업에 대해 기왕의 성적을 명확하게 함으로 장래의 경영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위해 특별히 한 항목을 두어 기술하였다.

그렇지만 이를 상세하게 서술하는 것은 쓸데없이 길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 개요만을 서술한다.



공진회장



2) 기획
이 계획의 단서는 일찍이 1913년(大正2)에 시작되었지만, 이를 실행하기에는 많은 경비가 필요할 뿐 아니라 교통기관을 완비하고 가로를 개축하고 또 다수의 관광객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1914년(대정 3) 제31 의회에 이와 관련한 예산을 제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정旣定 공사인 경원철도와 [121] 경성 태평통의 도로 개수 공사, 조선호텔 신축공사 등의 준공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1914년 3월 제국의회에서 공진회에 필요한 경비 예산 50만 원(1914년도 19만여 원, 1915년도 30만 8천여 원)을 승인해 주었다.

이에 그해 6월 훈령으로 '공진회 사무장정'을, 8월 '공진회 평의원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고, 사무총장(정무총감) 이하 임원을 선정하여 마침내 그 실시에 착수했다.



공진회장 조감도



3) 실시와 성적
공진회는 구 경복궁 터에 18개소 3,700여 평에 달하는 진열관을 신축하고 근정전 등 구궁궐 건물도 이용하여, 1915년(대정4)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1일간 개설되었다.

특히 10월 1일 간인노미야閑院宮 및 간인노미야비閑院宮妃 전하를 모시고 성대한 개회식을 거행하였고, 전하께서 영지令旨를 내리시고 또 장려금을 하사하셨(이상 121쪽)

각주 100)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閑院宮載仁親王과 그의 부인 지에코智惠子이다.

다. 또 순종李王 및 순종비李王妃 전하, 이준공李埈公 전하도 참석하시고, 농상무대신 고노 히로나카河野廣中가 각원閣員을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2일에는 일본 적십자사 조선본부 제2회 총회와 애국부인회 조선본부 제3회 총희가 개최되어, 총재가 궁전하宮殿(102)를 모섰으며, 순종 및 순종비 전하. 이준공 전하 또한 이에 참석하셨다.

3일에는 조선 철도 1,000마일리 기념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이는 작년에 호남선 . 경원선이 완성되고, 본년 8월 함경선 일부가 완성되어 반도 철도의 총 연장이 1,000마일 이상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 본 공진희 기간에 실업實業 또는 학술에 관한 각종 대회와 기타 여러 회합이 개최되어, 모두 그 방면에서 큰 자극과 장려를 주었다.






이 공진회의 주된 목적은 과거 5년간 조선 산업의 진보를 전시하고, 생산품의 우열을 심사 . 품평하여 해당 업자로 하여금 더욱 그 사업에 정진하고 근검·역행하게 함으로써 시설의 개량을 도모하고 생산액의 증진에 힘쓰며 나아가 조선의 부력富力을 기르려는 것이었다. 결코 일시적인 홍행 위주의 전시성 행사가 목적은 아니었다. [122]

따라서 이번 공진회 시설에서는 엄격하게 허식을 경계하여, 출품에서도 공연히 사람들의 눈을 흘려 사치를 유발하는 등의 진열은 피하고 일상에서 빠트릴 수 없는 실용품을 출품하도록 함으로써 순박한 미풍을 함양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진열품을 농업 척식拓殖부터 미술품 ·고고 자료에 이르기까지 13部 46종류로 구별하였고, 출품 수는 총 4만 8,760여 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안에 내지와 대만에서 출품한 8,300여 점, 총독부와 소속 각 관청·도청·학교·이왕직 등에서 출품한 1만 3,970여 점을 제외하고 남은 2만 6,470여 점은 모두 민간에서 출품한 것으로, 지방 산업의 발흥을 점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 별도로 참고관參考官을(이상 122쪽)


101) 고노 히로나카(1849~1923)는 메이지 . 다이쇼 시대의 자유민권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후쿠시마福島 출신으로, 메이지유신 후 와카마쓰현 관리가 되었다. 이후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으며, 제1회 총선거 때 후쿠시마현에서 출마하여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연속 14회 당선되었고 1903년에는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1913년 가쓰라 다로桂太郞의 입헌동지회에서 활약했으며 1914년 제2차 오쿠마 내각에서는 농상무상을 역입했다. 1916년 오쿠마 내각 총사퇴 때 퇴임한 뒤 헌정희 설립에 참가한 그는 고문으로 취임하여 보통선거운동에 힘을 쏟았다. 

102) 당시 일본 적십자사 총재는 간인노미야閑院宮이었다.

103) 이왕가李王家와 관련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로 1910년 망국과 합께 대한제국황실이 이왕가로 격하팀에 따라 기존의 황실업무를 답당하던 궁내부를 계승하여 설치되있다. 조선충독부가 아닌 일본의 궁내성에 소속된 기구였다.



설치하여 내지로부터 들여온 이입품의 진열장으로 했다. 그리고 출품 심사를 완료한 10월 17일 포상 수여식을 거행하여 출품 인원 1만 8,900여 명 가운데 6,965명에게 포상을 수여했다.

이 공진회 개설 기간 중 관람자 수는 총 116만 4,000여 명에 달했다. 이들 관람자 중에는 쓸데없이 예전 낡은 방식을 고수하여 시운에 순응할 줄 몰랐던 자도 공진회의 성황을 목격하고 나날이 진보하는 추세에 놀라,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 이전의 잘못을 깨달아 근검 역행에 뜻을 둔 자도 적지 않았다.

또 조선이 어떠한지 이해하지 못했던 내지인들도 그 생산물이 부유하고 이원利源이 무진장한 것을 알고, 총독부 시정의 방침을 이해함과 동시에 갑자기 투자할 생각을 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또 공진회 사업을 원조하기 위해 각 도청과 부청 소재지에 협찬회 혹은 관람장려회를 설치하여 내외 관광객 및 단체 관람자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도모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도읍. 명승지의 소개에 매우 힘썼다.

그 결과 각지의 명승·고적·사찰·온천·광산 등이 두루 여행객의 탐방지가 되었고, 조선의 물산 이외의 모든 진상眞相도 내지인에게 자세히 알려졌다. 따라서 이 공진회가 간접적으로 [123] 조선 통치에 미친 효과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104)

각주 104) 공진회가 조선충독부의 시정을 선전하기 위한 사업이었다는 것은 이 부분의 서술을 풍해서도 관 알 수 있다.


데라우치



4) 총독의 유고
데라우치 총독은 공진회가 종료되자, 그 다음 해 특별히 유고諭告를 발표하였다. 유고에서 데라우치 총독은 천황 폐하의 뜻을 받들어 병합 당시 발표한 유고의 방침에 기초해 관민일치를 잘 이루어 지금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음을 서술하고, 공진회의 성적을 감안해서 장래 채택해야 할 길을 제시했다. 그 서술 내용은 이 기간의 통치 성적을 훌륭하게 개괄했다. 따라서 그 요점을 간추려 아래에 게재한다.

총독은 여러 산업 가운데 농업을 급무 중의 제일로 삼고 이에 주력하여 개선에 힘쓴 결과, 그 총 생산액은 5년간 거의 배로 늘어나 3억 원을 초과했다.

미곡의 경우에는 조선 내에서 사용하기에 아직 여유가 있고, 최근 1년간 수이출액(원문 오타)은 약 2,200만원에 달하였다. 그리고 저축계·부업계副業계 등의 수는 전국에 절쳐 총 6,600여(
이상 123쪽)

개이고 그 저축액은 80여 만 원이며, 조선인의 우편저급은 그 총액이 160여 만 원을 초과했다. 그렇지만 이는 다년간의 쇠약해진 형세를 만회해서 겨우 진보의 도정에 오른 것에 불과하고, 경지 면적은 280여 만 정보로 겨우 전 면적의 100분의 12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래 크게 관개 수리의 편익을 도모하여 산록 또는 간석지의 개척이 급무임이 지적되었고, 또 이러한 견지에서 크게 수원합양림水源涵養林(105) 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논의되었다.

각주 105) 빗물을 흡수하여 수원의 고갈을 방지하고, 또한 수류가 일시에 하천에 집중하여 홍수를 일으키는 것을 막는 삼림

농업 이외의 부분에서 광산액鑛産額은 1년간 600만 원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 5년 후에는 약 1,000만 원으로 증가하였고, 수산물은 700만 원 내외였던 것이 1,200여 만 원에 이르렀다. 공업 제품은 연액 1,550만 원에서 2.950만 원으로 발전했으며, 상사회사商事會社의 투자액은 8,500만 원에서 1억 4,000만 원으로 증가하여 모두 순조로운 발달을 보이고 있다.

산업과 맞불려 교통기관과 관련해 서술하면, 총독부 설치 이전에 개수했던 도로는 겨우 22선 205리에 불과했는데 이후 일
정한 개수 계획에 [124] 따라 전체 길이 약 5,500리의 도로망을 확정하여 5년간 3,500여 리의 개수를 완료하였다. 


철도는 이미 착수한 부산·신의주 사이의 종단선과 그 지선 이외에도 호남·경원 두 선의 신설을 실행하고, 또 그 계획을 급속히 진행하였으며, 함경선 일부도 개통시켜 지금에는 총 연장 1,006마일에 이르렀다. 이는 중요 항만의 수축과 맞물려 국내 운수의 편익을 완수함과 동시에 유럽아시아의 교통의 요로로서 대체로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또 통신 기관도 중앙과 지방에서 모두 비상한 발달을 이루어, 대체로 종전보다 배가되는 성황을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구주전란은 조선의 무역에 오히려 양호한 영향을 주었다. 최근 무역 연액은 출입 총액이 1억 1,000여만 원에 달하고, 이는 5년 전과 비교하여 거의 배가한 것으로 상당한 장족의 진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난날의 수이입 초과 비율은 수이출에 대해 10할을 조급 넘었는데, 지금은 겨우 2할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다만 기계와 기타 필수품 이외의 사치품·음식물의 수이입이 상당히 큰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한다. 또 전화戰禍가 서양에 널리 퍼저 우리 국민이 유럽 제품에 의지하던 편리가 사라진 것은 오히려 자작자급自作自給의 기운을 촉진하는 좋은 기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교육에 대해서는 병합 당시 공립 보통학교가 겨우 100개 교에 지나지 않있는데 3백(이상 124쪽)  

수십여 개 학교를 증설하고, 점차 교육기관의 개선·확충을 계획하여 전문교육에 미치도록 했다.

또 교육 방침으로는 충순忠順·근면을 주된 것으로 하고, 공연히 이론에 치우쳐 공상에 빠지는 것이 없게 하였다. 이를 통해 물질 방면의 발달과 함께 충실한 생각과 온건한 기풍을 합양하며 개인의 복리와 함께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잊지 않고, 순충지성純忠至誠으로 성세聖世의 양민良民으로서 정성을 다해 보은하려는 각오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125] (이상 125쪽

 
*** 

이상은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 김민석, 최은진, 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에 의거한다.

[숫자]는 원서 쪽수이며 붉은 숫자는 번역본 쪽수다.

상·중·하 세 책인 이 번역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시정25년사』와 『시정30년사』를 번역하고 각주를 붙인 것이다. 

개중 상·중 두 권이 시정25년사이며, 마지막 하가 시정30년사다. 시정30년사 전반부는 시정25년사와 겹치는 까닭에 이 겹치는 부분은 번역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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