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조선총독부 시정25년사가 증언하는 1925년 을축년대홍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7.
반응형


 
2) 기타 한·수해 구제

조선에서 한해와 수해는 거의 매년 일어나서 일일이 거론하려면 한이 없는데 1919년의 한해에 이어 특별히 기록해야 할 것은 1924년(大正8)의 한·수해와 1925년(대정9)의 대수해다. 

1924년(대정8)은 갑자년甲子年으로, 조선의 미신에 따라 일반의 무지한 인민 사이에 연초부터 인심이 흉흉했다. 그런데 모내기철이 되어 쌀 산지인 남선南鮮 지방에 대한해가 일어났고 모내기를 할 수 없는 논은 전남 전북 경북 경남 충남의 여러 도에 걸쳐 약 26만 1천 정보에 달했으며, 약 300만 석이 감수減收할 것으로 예상되어[520] 남선 일대의 인심은 날로 험악해져 갔다. 

이에 총독부를 비롯해 도 당국에서는 최선으로 그 대책을 강구했다. 전남도청의 경우는 솔선해서 이들 재해지의 대용작代用作으로, 메밀·피·조의 종자 약 8,000석을 만주에 주문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행히도 7월 중순부터 단비가 쏟아져 관민 모두 인심을 덜었다. 

하지만 이 비가 호우로 변해, 경기도를 비롯한 서선西鮮 일대의 크고 작은 하천이 범람하고 교통 두절·논 매몰·가옥 침수·인축人畜 피해가 많은 수에 달했다.

이에 총독부는 은사이재구조기금恩賜罹災救助基金에서 구제비를 지출하는 외에, 국비 375만 원을 지출해 구제에 충당했다. 그 대책과 방법은 대체로 1919년(대정 8)의 경우와 대동소이하기에 거듭 말하지 않겠다.




1925년(대정 14) 7~8월의 대수해는 60년 만의 대재해였다. 남부의 낙동강 범람부터 중부의 한강 홍수를 비롯해, 함북 일부를 제외한 조선 전 지역에 재해의 피해가 미쳤다.

범람 면적은 약 16만 정보에 달했으며 사망자 647명을 냈고 유실 가옥은 1만 호를 헤아렸으며, 푸른 논이 진흙탕으로 변했고 피해 총액은 1억 300여 만 원이란 거액에 달했다.

따라서 총독부는 은사이재구조기금에서 13만 4,710원을 지출하고, 또한 일반에서도 약 70만 원의 의연금을 모금해 이재민의 응급 구조를 수행했다.




이 외에 국비 450만 원을 들여 재해복구공사를 일으켜 임금 지급을 통해 이재민을 구조하고자 했는데, 그 방법은 1919년(대정8) 한해의 경우와 거의 동일하므로 이 또한 설명을 생략하겠다. (489쪽) (제3기 사이토 충독 시대)




 
*** 

이상은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 김민석, 최은진, 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에 의거한다.

[숫자]는 원서 쪽수이며 붉은 숫자는 번역본 쪽수다.

상·중·하 세 책인 이 번역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시정25년사』와 『시정30년사』를 번역하고 각주를 붙인 것이다.

개중 상·중 두 권이 시정25년사이며, 마지막 하가 시정30년사다.

시정30년사 전반부는 시정25년사와 겹치는 까닭에 이 겹치는 부분은 번역에서 제외했다 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