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475년간 이어졌다. 그동안 그림을 잘 그린 사람이 한둘이었겠냐만, 작품은 고사하고 이름 몇 자만이라도 역사에 남긴 이는 손에 꼽는다.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라 할 수 있는 위창 오세창(1864-1953)이 남긴 서화가사전 <근역서화징>에도 고려시대 인물은 별로 실려있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의 이규보 선생님은 그 점에서도 큰 도움을 준다. <동국이상국집> 곳곳에 그가 감상한 그림을 읊은 시가 실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 작자 이름을 밝히고 있고, 읽다보면 그림이 그려질 듯 내용도 퍽 구체적이다.
그래서인지 위창도 <근역서화징>에서 이규보의 글을 적잖이 인용하고 있다.
자, 그러면 그중 하나를 읽어보도록 하자.
물은 물고기의 집이라 / 水爲魚所家
물 잃으면 솥 안의 생선이지/ 失則鼎中鮮
사람이 물 속의 고기를 그림에 / 人畫水中魚
솥 속에 든 것처럼 그릴진대 / 如向鼎中傳
비록 헤엄치고 노는 모습이라도 / 雖爲游泳態
오히려 물 잃은 것과 같으리 / 尙類失水然
정군은 참으로 신필이로다 / 鄭君信神筆
현묘한 수법 하늘에서 얻었네 / 妙手得於天
한 번 붓 휘둘러 그린 수십 마리 / 一掃數十尾
물고기 모두가 팔팔하다네 / 發發皆鮪鱣
물을 얻어 형세 이미 넉넉하니 / 得水勢已足
하필 잔잔한 물결 그려야하나 / 何必寫漪漣
지느러미 일어나 움직일 듯하고 / 䰇鬣欻欲動
눈동자 찬란하여 야광주 같도다 / 目力珠光旋
아마도 그대는 봉래도의 손님으로 / 疑君蓬島客
오랫동안 물 속 신선이 되었었던가 / 久作水中仙
물고기일랑 익숙하게도 보았기에 / 看魚飽且熟
손길 따라 떼지어 오르내리는 듯 / 應手隨所沿
손가락 들어 만져보고 싶지만서도 / 擧指欲捫觸
뛰어나와 깊은 연못에 숨을까 두려워 / 猶恐跳藏淵
나의 시 기력이 딸린다마는 / 吾詩氣力苶
감히 <활어편>을 지었노라 / 敢作㓉魚篇
-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13, 고율시, "연淵 수좌首座 방장方丈에서 정득공鄭得恭이 그린 어족자魚簇子를 감상하고서"
"정득공"이라는 화가(득공은 아마 자겠지만)가 그 시절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물고기를 잘 그린 모양이다. 오죽하면 "신필"이라고 했을까?
잉어를 잘 그린 소림 조석진(1853-1920)에 견줄 만 했던지... 하여간 그가 그린 물 속 세상 그림을 어떤 스님이 족자로 꾸며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 백운거사라는 귀한 손님이 오니 꺼내어 걸어 보여드렸던가 보다.
우리 친구 이규보 아저씨가 얼마나 열심히 그림을 감상하고 "실감"을 느꼈으면 손가락을 들어 물고기를 만져보고 싶다고까지 했을까?
요즘 박물관마다 틀어주곤 하는 실감영상(신기술융합콘텐츠영상이라고 부르라는데 길어서...)을 보여드렸다간 까무러치셨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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