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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이규보 선생을 개무시한 오주 선생 이규경

by taeshik.kim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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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라는 책을 편찬하여 한국 역사에 불후의 이름을 남긴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1788~1856)이라는 분이 있었다.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손자로 그 스스로도 책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사람인데, 뜻밖에 우리 고문헌에는 다소 어두웠던 것 같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중에 "석교釋敎·범서梵書·불경佛經에 대한 변증설辨證說"이란 글이 있는데, 거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논한 대목을 보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우리나라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또한 변증하지 않을 수 없다.

해인사는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 가야산伽倻山에 있는 신라시대 고찰古刹이다. 경판經板은 해인사 보안당普眼堂 남쪽과 북쪽 두 각閣에 저장되어 있는데, 모두 15칸[間]에다 옆이 3칸으로 도합 90칸이다.

한가운데 3층으로 시렁을 설치하고는 경판을 가득 꽂아 놓았는데, 경판의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1척 반이고 너비는 주척으로 2척이며, 변격邊格만 있고 오사란烏絲欄은 없다.

12항行에 항마다 14자字인데 글자의 크기는 마치 바둑알만하고, 글씨는 매우 해정楷正하나 별로 취할 만한 것은 없다.

경판은 모두 옻칠을 하였는데 별로 윤이 나지 않고, 네 귀퉁이에는 구리[銅]를 얇게 올려 장정裝釘하였다.

《고적지古籍志》에 상고해 보면 “신라 경장왕景莊王 때에 합천陜川의 이서里胥(촌락의 하급관리)인 이거인李居人이 명부冥府(저승)에 들어가 삼목인三目人을 만나 염왕閻王(염라대왕)에게 발원發願하고 이승[陽界]에 돌아와 왕에게 고하여, 왕의 명으로 거제도巨濟島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여 해인사에 옮겨 저장했다.”고 하였으나 그 설이 황당무계하여 믿기가 어렵다.
...

누판기鏤版記에 해인사의 중이 별도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무신년戊申年에 고려국 대장도감高麗國大藏都監이 칙명을 받들고 판각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우리나라 세조世祖가 탑인搨印한 그 책의 경권經卷 안쪽에, 하나는 “계묘세癸卯歲에 대장도감이 칙명을 받들고 판각했다.”고 새기고, 또 하나는 “갑진세甲辰歲에 판각했다.”고 새겼는데, 고지古志에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정묘년에 판각했다.”고 하였다.

애장왕은 당 덕종德宗 16년(경진)에 즉위하여 10년 만인 당 헌종憲宗 원화元和(806~820) 4년(기축)에 헌덕왕憲德王에게 시해되었으니, 그가 재위한 기간에는 아예 정묘년이 없다.

고려를 통틀어 계묘년이 여덟 번, 갑진년이 여덟 번이고 보면, 이는 아마도 고려시대에 주조한 것인 듯하다.

해인사 중이 별도로 기록한 것에 “무신년에 판각했다.”고 하였으니, 고려조의 정종定宗 3년, 목종穆宗 11년, 문종文宗 22년, 인종仁宗 6년, 명종明宗 18년, 고종高宗 35년, 충렬왕忠烈王 30년, 공민왕恭愍王 7년이 다 무신년이다.

 

 
 
옛 기록을 무조건 믿지 않고 그 근거를 추적해들어가는 것이 제법 고증학자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개인적으로 "글씨는 매우 해정하나 별로 취할 만한 것은 없다." 같은 내용은 동의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규경은 정작 결론을 엉뚱하게 내고 있다. 그게 문제다.


나는 생각하건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맨 처음 판각한 것으로 본다.

《고려사高麗史》 종실전宗室傳을 상고하건대, 대각국사는 곧 문종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후煦이고 자는 의천인데, 송 철종哲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로 행세하였다.

국사가 출가하여 중이 되고는 영통사靈通寺에 있으면서 비로소 화엄華嚴을 닦아 오교五敎를 통달하였다.

선종宣宗 2년(을축)은 곧 송 신종神宗의 원풍元豐(1078~1085) 8년인데, 이해에 의천이 사사로이 제자 2명과 함께 송나라 상인商人인 임영林寧의 배를 몰래 타고 송나라에 들어가, 석전釋典 및 경서經書 1천 권을 얻어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고, 또 주청하여 흥왕사興王寺에다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는 요遼·송 등지에서 무려 4천 권에 이르는 많은 서적을 구입해다가 모두 간행하였다.

그리고 국사는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여 국청사國淸寺에 본부를 두고 있다가, 이윽고 남쪽으로 내려가 명산名山을 두루 편람한 다음 해인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숙종肅宗이 즉위해서는 사자를 보내어 그를 맞아다가 흥왕사 주지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 왕고王考(할아버지) 청장관선생靑莊館先生(이덕무)이 찬한 《앙엽기盎葉記》에 “의천義天은 곧 선종·숙종의 아우이다. 선종 2년(을축)은 곧 송 신종 원풍 8년이요, 요 도종道宗 대안大安(1085~1094) 원년이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경판을 고지古志에는 이르기를 ‘신라 애장왕 정묘년에 판각했다.’ 하였으나, 애장왕이 재위한 10년 동안에는 아예 정묘년이 있지 않으니, 이는 아마 고려 선종 4년(정묘)에 의천이 판각한 경판을 애장왕 정묘년에 판각한 것이라고 와전된 것이다.

의천이 이미 해인사에 물러와 거주하였으니, 이 절 안에 경판을 저장하는 것이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내가 해인사에 가 놀면서, 시험삼아 세조世祖께서 탑인한 경권經卷 두 책 아래쪽을 살펴보니, 하나는 ‘계묘세에 대장도감이 칙명을 받들어 판각했다.’고 새겼고, 또 하나는 ‘갑진세에 판각했다.’고 새겼으며, 또 해인사의 중이 별도로 기록한 것에는 ‘무신년에 고려국 대장도감이 칙명을 받들어 판각했다.’ 하였다.

의천이 간행한 것은 모두 5천여 권인데, 지금 소장되어 있는 원수元數는 6천 5백 29권으로, 그 수가 서로 같지 않은 것은 계묘년 이후로 해마다 보각補刻하였기 때문이니, 의천이 판각하지 못했던 것은 1천 5백여 권이다.” 하였다.


물론 지금 우리는 의천이 교장도감을 설치해 판각한 것이 '교장'임을 알고 있다.

아울러 그 이전에 '초조대장경'이 있었고, 지금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재조대장경'임도 안다.

하지만 이규경은 의천이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다고 믿었다.

그 근거로 든 것은 <고려사>의 '교장도감' 기록과 의천이 해인사로 물러나 살았다는 내용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보면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이 있는데, 이규경이 그건 못 보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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