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조실록> 1727년(영조 3) 7월 17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주시濟州試에 입격入格한 사람 이귀제李龜濟를 빼라고 명하였다. 이귀제는 고故 승지承旨 이익태(李益泰, 1633~1704)의 아들인데, 이익태가 제주목사濟州牧使이었을 때에 이귀제를 낳았다. 이귀제가 태어난 고장이기 때문에 (제주에서 시행한) 과시科試에 나아가 입격入格하였는데, 부교리副校理 송진명(宋眞明, 1638~1738)이 상소하여 논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원적原籍을 살피게 하였더니 과연 원적이 중첩되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이귀제는 <지영록知瀛錄>의 저자로 유명한 이익태가 제주목사로 있을 때(1694~1696) 제주에서 낳은 아들이다(육지 사대부가 제주에서 자손을 얻은 경우 제濟 자를 이름에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익태가 죽고 20여 년 뒤 제주에서 제주 선비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를 치를 때, 30세 전후였을 이귀제가 거기서 시험을 쳐 합격했다.
그런데 이귀제가 '제주 선비'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을 치를 자격이 있느냐를 문제삼은 이가 있었다.
이익태의 고향은 홍산현鴻山縣, 지금의 부여군 홍산면이었다. 이귀제의 호적을 살피니 제주목에도 있었지만 홍산현에도 있었으므로, 이는 '제주 사람'이라 할 수 없으니 합격을 취소하라고 한 것이다.
2. 그런데 이는 단순히 이렇게만 끝낼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승정원일기> 1727년 10월 9일자 기사를 보면...
제주목의 무과武科에서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얻은 홍진하洪鎭夏ㆍ현진우玄眞虞ㆍ부찬夫粲ㆍ고석암高碩巖ㆍ김천정金千錠ㆍ고세련高世連ㆍ임중수林重樹ㆍ김취감金就礛ㆍ김후완金厚完ㆍ부계발夫繼發ㆍ허지許池ㆍ원무발元武發ㆍ부천중夫天重ㆍ김국보金國輔ㆍ김후택金厚澤ㆍ김계경金繼慶ㆍ허준許準ㆍ안후安後ㆍ강덕웅姜德雄ㆍ박완석朴完錫ㆍ김윤주金胤胄ㆍ고귀적高貴積ㆍ김창석金昌錫 등이 상소하기를,
" ... 또 신들은 이번 본 고을 문과 시재에서 장원한 이귀제를 방목榜目에서 뺀 일을 매우 개탄하옵니다. 이귀제는 저희 섬에서 나고 자라 저희 섬의 역役에 응하였고 한양에 유학하여 제주의 자제에게 지급하는 늠료凜料를 받았으니 이 사람은 참으로 제주 사람입니다.
그는 재주가 있고 학문에 뜻을 두어 반드시 성취하고자 하여 육로를 왕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충청도 홍산현에 살고 있는 그의 적형嫡兄 이귀렴(李龜濂, 1665~?)이 지난 경자년(1720년, 숙종 46년)에 우연히 그의 가솔로 중첩하여 입적入籍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법에는 중첩하여 입적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내지內地에 입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경자년 이후로는 (이귀렴이 이귀제를) 더 이상 가솔로 입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지난 식년式年에 중첩하여 입적하였다는 이유로 과명科名을 그대로 빼도록 하였으니, 이 어찌 몹시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식년에 그 형의 가솔로 중첩하여 입적된 것 또한 그의 죄가 아니어서 실제로 주호主戶로서 살고 있던 것과 달랐습니다.
더구나 경자년에서 정미년(1727년)까지 지금 몇 년이 지났습니까.
이번에 과거를 설행한 것은 곧 섬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으로, 이귀제는 제주에서 출생하였고 또 제주에서 역에 응했으며 그 어미의 무덤을 쓴 선산先山도 제주에 있습니다.
한데 너무나도 원통한 일로 끝내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이름을 방목에서 빼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이귀제 한 사람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섬에 사는 모든 사람도 이를 통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당초에 조정에서 섬사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던 뜻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들이 번거롭고 외람된 것을 피하지 않고 감히 이렇게 상소의 말미에 아뢰는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살펴 주소서.
신들은 너무나도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를 보면 이귀제는 이익태가 제주 여인(기생?)을 소실로 맞아 낳은 서출이었다.
이 시기는 제주 사람이 육지에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출륙금지령이 엄연했던 때로, 이익태 목사도 소실과 아들을 두고 나와야 한 모양이다(참고로 이 분도 진상한 귤이 썩어서 파직당했다...).
비록 그러하나 육지 양반의 핏줄은 핏줄이므로 이귀제도 글공부를 할 수 있었고, 육지에 있는 아버지 집안이 그를 긍휼히 여겼는지 이복 형(이라고는 하지만 나이차이는 한 30년 나는)이 자기 호적에 넣어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가 되서 과거 합격이 취소되었으니, 이귀제 본인이 억울한 것을 넘어 제주도 지식인 사회가 들썩였다.
이에 그들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이귀제의 급제를 청원했다. 하지만 영조의 답은 차가웠다.
"이귀제의 일에 대해 그대들이 상소에서 청한 것은 외람된 일이다."
영조 스스로도 서출이라면 서출이건만.
3. 이후 이귀제 행적은 <영조실록>엔 보이지 않고 <승정원일기>에서 이따금 보인다.
1729년(영조 5) 9월 제주 유학(幼學, 과거 급제하지 못한 선비)들이 연명으로 탐라耽羅의 세 개국開國 시조를 제사 지내는 사당에 편액을 내려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말미에 '이귀제'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734년(영조 10), '이귀제'라는 이름의 사인士人이 관상감觀象監에서 천문학을 가르치는 교수敎授로 발탁된다.
다시 그로부터 6년 뒤인 1740년(영조 16) 11월, '이귀제'는 사축서司畜署 별제別提 신분으로 영조를 알현하게 된다.
그날의 장면을 <승정원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귀제가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관직과 성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니, 이귀제가 아뢰기를,
“신은 사축서 별제 이귀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력은 어떻게 되는가?”
하니, 이귀제가 아뢰기를,
“갑인년(1734)에 관상감 천문학교수觀象監天文學敎授로 계하啓下받았고, 근무 기간이 차서 6품으로 올라 본서를 맡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직장職掌은 무엇인가?”
하니, 이귀제가 아뢰기를,
“연향宴饗에 필요한 희생犧生과 잡축雜畜을 사육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아 있는 수량은 얼마인가?”
하니, 이귀제가 아뢰기를,
“양 40구口, 염소 50구, 돼지 50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회所懷는 무엇인가?”
하니, 이귀제가 아뢰기를,
“제조提調가 있어서 폐해가 있으면 변통하므로, 신은 달리 아뢸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겸관兼官 외에 사대부도 교수가 된 자가 있는가?”
하니, 승지 윤경룡(尹敬龍, 1686~1743)이 아뢰기를,
“지난번 정선(鄭敾, 1676~1759)이 사대부로서 교수가 되었는데 승진하여 의금부 도사에 천전되었다가 사람들의 비난이 있어서 즉시 체차되었습니다.”
하였다.
여기 등장하는 '이귀제'가 이익태의 서자 이귀제가 맞다면, 아무래도 영조는 13년 전 자신이 바로 앞에 있는 이의 과거 급제를 취소시켰던 사실을 기억 못했던 것 같다(그냥 알면서도 언급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귀제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왕만 아니라면 따져 묻고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뭐 할 말이 있느냐 물어도 "제조提調가 있어서 폐해가 있으면 변통하므로, 신은 달리 아뢸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4. 한 달 뒤인 1740년 12월, 장령 이석복(李錫福, 1694~?)이라는 이가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이귀제를 한 차례 언급한다.
그런데 그 내용인즉슨 "각 관사에서 관리를 제대로 선발하지 못하는 것이 근래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니,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옹원 첨정司饔院僉正 원경운(元慶運, ?~?)은 늙고 어리석으며 사축서 별제 이귀제는 노쇠하고 우매한 자인데도 구차하게 인원수만 채우고 있어 모두 물의物議에 어긋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손가락질하기를 오래도록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였다.
이귀제하고 동갑이거나 한두살 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사람이 이귀제를 "노쇠"하다고 깎아내린 것이다. 어떻게든 폄하하려 한 걸 보면, 아무래도 이 사축서 별제 이귀제가 곧 이익태가 제주에서 얻은 서출 아들 이귀제이었을 가능성이 크지 싶다.
이후 이귀제는 기록에서 사라진다.
일을 그만두고 제주로 돌아갔을까? 어디서 어떻게 삶을 마쳤을까?
혹 연안이씨 족보에는 나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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