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야외에는 조선왕릉 석조물이 잔뜩 진열되어 있으니, 구영릉 석물 舊英陵 石物 이란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영릉英陵은 경기 여주에 소재하거니와, 조선조 제4대왕 세종과 그의 왕비 소현왕후를 합창한 무덤이다.
본래 영릉 자리는 이곳이 아니다. 지금은 아마도 국정원이 들어간 서울 서초구 내곡동이 그 자리라, 풍수상 길지가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 원년(1469) 현재의 자리로 천장遷葬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야외에 전시 중인 석물들은 바로 이곳 제1차 무덤에 쓴 문관 석인상과 무관 석인상 각각 2쌍과 상석床石, 호석 등등으로 구성된다. 현재의 석물들이 온전한 세트 전부인지는 내가 당장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어찌하여 이들 석물은 현재에 이르게 되었을까?
아! 이런 석물 말고 그 무덤 앞에다 세운 세종 기념비인 신도비도 있다.
이들 옛 영릉 석물을 문화재정 제공 정보를 보면
구 영릉 조성과 시기를 같이 하여 세워진 것으로 영릉이 여주로 천장될 때 운반상의 어려움 때문에 땅에 묻혔다
고 하지만, 이는 역사를 호도하는 기술이다.
운반상 어려움 때문에 여주 영릉으로 옮겨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초 옮겨갈 수 없었기에 옮겨가지 않았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덤에서 시신을 파내어 여주로 옮기면서 저들 석물은 신도비와 더불어 그 자리에다 묻었던 것이다.
이 묻은 것을 어찌하여 1973∼1974년 다시금 발굴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 석물은 옮기지 못했을까? 새로운 무덤을 만들면 그에 따른 새로운 석물을 만들어야 하며, 이럴 경우 옛 석물은 그 자리에 묻어야 한다는 예서禮書의 규정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묻었을까? 다른 데다가 재사용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것은 그것이 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귀신을 위한 신물神物인 까닭이다.
산 사람이 그것을 다른 데다 쓰는 일은 신성구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그런 행위는 재앙을 부르는 일로 간주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귀신이 쓰는 물건인데 재수 옴 붙는다는 정서도 있었음을 말할 나위가 없다.
천년 고도 경주를 보면, 건축물에 사용한 각종 건축 부재, 특히 석재는 재활용 흔적이 너무 완연하다. 쓸 만한 돌은 전부 다 갖다가 성벽을 쌓거나 관아를 세우거나, 가정 집을 짓는데 다 썼다.
그래서 그 천년 왕성 월성만 해도 현지 사정에 매우 밝은 오세윤 사진작가에 의하면, 지상에 노출된 신라시대 석조물은 꼴랑 2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많던 초석이니 장대석이니 하는 돌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다른 건축물 짓는데다 다 갖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년왕성 월성에 신라시대 석물이 깡그리 사라진 것이다.
이는 경주 다른 지역 사정을 봐도 다 그렇다. 용케 남은 초석은 후대 그 위에 가정집들이 들어앉는 바람에 살아남았을 뿐, 외부로 노출된 석재들은 모조리 재사용됐다.
한데 희한하게도 왕릉과 같은 무덤을 쓰는 데 사용한 돌들은 비교적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이 점 신비롭기 짝이 없다.
그때 문화재보호법이 있었을 리 만무한 법이고, 쓸 만한 돌들은 모조리 다 긁어가는 판국에 어찌하여 왕릉을 만드는 데 쓴 호석 등은 멀쩡하게 살아남았을까?
이는 그것이 신물이기 때문이다. 귀신을 위한 신물인 까닭에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왜 유독 절터 혹은 과거에 절터였던 곳을 발굴하면 땅 속에 한꺼번에 묻은 불교공양구가 떼거리로 나올까 하는 의문은 바로 이에서 풀린다.
오늘 문화재청이 발표한 경주 흥륜사 서쪽 하수관로 배설 예정지역에서 발굴된 불교공양구 역시 이를 하등 배반하는 구석이 없어, 무덤을 다른 데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있던 석물들은 그 자리에 파묻은 그 발상과 한치 어긋남이 없이 일치한다.
이번에 철솥과 그 안에서 50점 이상이 발견된 각종 불교공양구는 "화재나 사고 등의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급히 한곳에 모아 묻어둔 퇴장退藏 유물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저와 같은 비상상황에 황급히 묻은 결과가 아니라, 용도를 다한 공양구들을 장송葬送한 흔적이다.
다시 말해 전쟁이나 화재와 같은 비상 사태에 그것들을 보호하겠다 해서 묻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제는 쓰임을 다했으니, 그것이 부처님을 공양하던 신성한 성보聖寶라 해서 그 격에 어울리게 고이 장사지내준 것이다.
저와 같은 청동은 워낙 그 당시에도 귀한 금속인 까닭에 보통은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데 쓴다. 동전을 만들 수도 있고 기타 다른 물품으로 얼마든 재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저들은 달랐다. 부처님이 쓰시던 물건이다. 그래서 저런 공양구는 민간에 불하할 수도 없고, 녹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모아서 한꺼번에 장사를 지낸 것이다.
이는 그것이 발견된 지점과 그 양태를 봐도 명백하다. 거대한 철솥을 일부러 고이 안치한 다음, 공양구들을 정성들여 쓸어담아 넣었다. 어디에?
워낙 발굴지점이 협소한 까닭에 확실치는 않지만, 조사단이 배포한 사진들을 검토하면 어떤 건물터 내부임을 안다. 다시 말해 마루 바닥에다가 묻은 것이다.
그렇다면 묻은 시기는 언제쯤인가?
위선 그 유물들이 통일신라~고려시대에 해당한다는 점을 하한선으로 잡아야 한다. 이로써 본다면 고려시대 어느 시점에 폐기된 것이다.
내가 볼 때는 고려 중기다. 유물들 보니 딱 그 시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는 그것이 발견된 지점 건물터에서 발견되는 기와를 볼 때도 명백하다.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된다.
이로써 본다면 정확한 시점은 가늠할 수는 없지만 고려중기 혹은 그 시점에서 얼마 내려오지 않는 적어도 고려 말 이전에 저런 매장 행위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저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예서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저 공양구들은 기종이 다르고, 또 동시기에 제작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나이가 다 달랐을 텐데 저리 한꺼번에 기능이 끝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쓰임을 다한 공양구들을 사찰 어딘가 창고 같은 데다가 하나씩 모아뒀다가 어느 시점에 폐기물이 일정 수량 이상 되면 묻었다? 이것도 상상하기 힘들다.
저 중에서는 깨져서 사용이 힘든 것도 있겠지만, 또 개중에는 멀쩡한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예서 나는 불사佛事의 짙은 그림자를 본다.
저때나 지금이나 불교가 살아가는 방식은 똑같다. 이벤트다!
대웅전 낙성식이니 불상 점안식이니 해서 각종 이벤트를 만들어 이때 표현이 좀 그렇지만 왕창 땡긴다. 돈 많은 사람들한테서 시주금 왕창 땡겨 대대적인 불사를 한다.
나는 틀림없이 저 공양구들이 묻힌 시점에 지금의 흥륜사, 그때의 영묘사에서는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있었다고 본다. 이 불사를 기회로 저기에 묻힌 공양구들을 대신하는 새로운 공양구들이 대량으로 제작 납품되었다고 본다.
새로운 공양구의 등장은 옛 공양구의 퇴진을 의미한다. 이 참에 새것들로 쏵 개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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