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08 08:00:00
<추사에 매몰된 고증학 연구자 후지츠카>
"추사의 발견은 고증학 연구의 부산물"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사거 150주년이라는 바람은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1879-1948)라는 다소 생소한 일본사람을 실어나르고 있다.
종래 한국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후지츠카는 무명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늘 추사와 같이 호명呼名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추사를 근대적인 학문연구의 대상으로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 후지츠카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인이라면 초동급부樵童汲婦도 그 이름을 알게 된 김정희를 무명과 망각의 그늘에서 건져내 일약 스타로 길러낸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후지츠카였다.
하지만 그가 추사를 주목하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후지츠카의 꼬리를 부여잡아야만 했던 추사는 이제는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추사는 천리마가 되고, 후지츠카는 그 꼬리가 된 형국이다.
혹자는 후지츠카가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활약했고,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전력을 들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가 제시한 추사학 연구의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지적이 국내 학계에서 압도적이다.
추사를 조선이라는 한반도 좁은 울타리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동시대에 호흡한 지식인이요 종합예술인으로 바라본 것은 탁월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후지츠카가 최근에는 한국학계라는 범위를 벗어나 일반에게도 꽤 익숙한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기폭제는 과천시에 일괄 기증된 그의 수집품에 기인한다.
1948년 사망한 그가 생전에 수집한 자료들은 그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2006)에 의해 올초 두 번에 걸쳐 과천에 모두 기증됐다.
기증품은 아직 분류와 분석이 채 끝나지 않아 정확한 수량은 집계되지 않았으나 서책과 회화류, 원고 등을 합쳐 약 1만 점 가량으로 추산된다고 문우서림 김영복 대표는 전했다.
이들 기증품에는 추사 작품임이 확실하거나, 그렇다고 추정되는 작품 26점이 포함돼 있고, 추사와 당대 청대 학자들이 교류한 증거물이 다수 포함돼 있다. 따라서 향후 추사학 연구에서 이들 기증품은 긴요하게 활용될 전망이다.
한편, 추사를 발탁해 일약 유명해진 후지츠카는 도대체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추사를 주목하게 되었을까?
이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지금은 추사학 연구의 선두주자 정도로 자리매김되는 후지츠카가 지금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억울함을 호소할 만한 구석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후지츠카는 추사학 연구 전문가이기에 앞서 청대 고증학 연구자였기 때문이다.
후지츠카가 청대 고증학 연구를 시작하던 19세기말-20세기 초반 무렵만 해도 중국 본토에서는 고증학의 기풍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중국 본토를 진원지로 삼아 이웃 조선과 일본까지 막대한 파급을 미친 고증학은 그 전성기가 널리 지적되듯이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연간(1661-1799)이었으며 추사가 한창 활약하던 19세기 중반에도 여전히 그 여진은 컸다.
후지츠카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중국철학과를 다녔다. 그의 주된 연구분야가 바로 이러한 청대 고증학이었다.
그 연구를 심화하기 위해 후지츠카는 1921년 10월부터 1923년 5월까지 1년 반가량 베이징에 체류했다.
그러다가 1926년에 새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초빙되어 중국철학 강의를 담당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을 퇴임한 그는 일본으로 귀국해 대동문화원이란 곳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중국철학을 강의했다.
베이징 체류기간과 경성제국대학 교수 재직 시절, 후지츠카는 유리창(베이징의 고서점 거리)과 서울 인사동의 고서점가와 골동품 가게를 들락거렸다.
이 과정에서 그는 18-19세기 중국학자와 조선학자들이 주고받은 서간문과 탁본, 책 등을 다수 접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가 특히 주목한 인물이 김정희였다. 청대 고증학의 최대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성과로 황청경해皇淸經解라는 일종의 총서가 있다.
이 총서는 김정희와 생몰연대가 비슷한 청대 학자 완원(阮元. 1764-1849)이란 저명한 고증학자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청대 훈고학 총서다.
1825-1829년에 차례로 출간한 황청경해는 고염무(顧炎武) 이하 73명에 이르는 청대 고증학자들의 각종 경서해석 논문 묶음집이다. 여기에 수록된 논문집은 188종에 이르며, 총분량은 무려 680책에 이른다.
완원보다 31세가 많은 또다른 청대 저명한 고증학자로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특히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조선 금석문에도 관심이 지대했다. 옹방강이 완원과도 교류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데 후지츠카가 추적한 결과 황청경해-완원-옹방강이라는 뭉치는 조선에도 연결되며, 그 고리가 바로 김정희임이 확인됐다.
단순히 연결된 것이 아니라 김정희가 실상 완원과 옹방강을 사숙하다시피 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런 관계가 해명됨으로써 금석, 서예, 미술 등의 다방면에 걸쳐 김정희가 뚜렷한 업적을 낼 수 있었던 비결도 밝혀졌다.
청대 고증학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김정희를 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후지츠카는 그런 성과들을 묶어 1936년 4월 모교인 도쿄제국대학에 '이조에 있어서 청조 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이 논문이 나중에 '청조 문화의 동전(東傳)의 연구 : 가경(嘉慶)·도광(道光) 학단(學壇)과 이조(李朝)의 김완당(金阮堂)'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정리돼 나왔던 것이며, 추사학 연구는 이를 발판으로 비로소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증학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김정희에 대한 그의 연구성과는 나오기 힘들었으며, 그런 점에서 후지츠카의 김정희 연구는 그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런 면모는 이번 과천시 기증품에서도 단적으로 확인된다. 여기에는 그의 손때가 가득 묻은 많은 전적이 포함돼 있는데 황청경해 완질을 비롯해 거의 모두가 고증학과 관련된다.
추사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김영복 씨는 "후지츠카를 추사 연구자 정도로만 알고 있으나, 실상 그는 청대 고증학 연구자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taeshik@yna.co.kr
(끝)
2009.02.11 17:51:14
<'추사' 열풍의 근원 후지츠카>
과천문화원, 박사학위 논문 완역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명성은 그가 태어나던 그 순간에 바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그 추사는 청대淸代 고증학에 관심이 지대했던 한 일본인 연구자에게 뿌리가 닿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늘날의 추사 열풍에 기폭제가 된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1879-1948)의 도쿄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이 경기 과천문화원(원장 최종수)에서 '추사 김정희 연구'라는 제목으로 최근 완역돼 나왔다.
후지츠카는 1936년 4월 모교에 논문을 제출할 때는 '이조李朝에 있어서 청조淸朝 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것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그의 사후인 1975년. 그의 아들 아키나오(1912-2006)는 이를 편집해 '청조 문화의 동전東傳 연구 : 가경嘉慶·도광道光 학단學壇과 이조李朝의 김완당金阮堂'이란 제목으로 출판했다.
일본어 원서가 워낙 방대한 까닭에 과천문화원이 한문학 및 미술사학자인 윤철규, 이충구, 김규선 박사 3명에게 의뢰했다. 이번에 출간한 번역본 분량 또한 974쪽에 이른다.
후지츠카는 원저에서 많은 한문원전을 그대로 인용했으나, 이번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이를 모두 한글로 옮겼다.
이 책은 1995년에 발췌 번역이 이뤄진 적이 있으나 완역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천문화원이 후지츠카 저서를 완역하기로 한 데는 무엇보다 이 연구가 추사학의 기폭제가 된 데다, 그 연구 관점이 지금의 추사학에도 대부분 이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과천문화원은 추사학 연구의 본산을 자임해 왔으며, 아키나오는 타계 직전 추사 관련 자료를 비롯해 부친의 장서와 유물 대부분을 과천문화원에 기증하기도 했다.
과천문화원은 16일 오후 5시 과천시 대강당에서 추사연구회와 공동으로 이번 완역본 출판 기념을 겸한 발표회를 갖는다.
taeshik@yna.co.kr
(끝)
***
이들 기사에서 다룬 등총린 藤塚鄰은 ふじつか ちかし라 읽으니,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후지쓰카 치카시 라 해야 한다.
기사별로 표기가 왔다갔다 하는데, 저 기증품으로 토대로 건립한 과천 추사박물관에서는 후지츠카 치카시 라고 표기한다.
후자가 원어에 훨씬 가깝기는 하지만, 표기법상으로는 전자다. 둘을 혼용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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