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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이유 설명이 없는 《징비록》, 담을 넘는 구렁이

by taeshik.kim 2021.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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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애西厓가 일본의 침략이 없다고 보고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징비록懲毖錄》에서 시종일관해서 감싸고 두둔하려 했다고 했거니와 그것이 어떻게 《징비록에서 구현되는지를 보자. 


"(임금 선조가)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성일을 잡아서 옥에 가두려 했으나 (압송한 김성일이) 서울에 이르기 전에 (죄를 용서하시고) 도리어 초유사招諭使로 삼았다"


이것이 임란 발발 초반기에 일어난 일이다. 한데 이 대목에서 세심히 볼 것은 서애는 도대체 선조가 왜 느닷없이 전란의 와중에 경상도지역 군사를 관할하는 최고책임자인 학봉을 체포했는지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선조는 왜 김성일을 잡아들였는가?

 

 

서애. 그는 자신이 살고자 징비록을 썼을 뿐이다. 

 


이는 실록을 보면 의문이 풀린다. 김성일은 임란 발발 직전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 일원에서 넘버 2인 부사副使로 일본에 가서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직접 면담하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일본의 침략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에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이 그렇다고 답한 반면 학봉은 없다고 단언했다. 한데 일본이 침략했다. 선조로서는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허위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김성일을 잡아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잡아들여 서울로 압송 중인 김성일은 어떻게 풀려나고, 그에 더하여 초유사라는 중책까지 맡았는가? 그것이 바로 류성룡의 두둔에서 말미암았다. 서애는 선조를 설득해 김성일을 풀어준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를 초유사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학봉은 임란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징비록 필사본

 


학봉이 사는 길은 멋지게 죽는 길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살고 후손과 가문이 사는 오직 유일한 길이었다. 학봉은 실제로 그렇게 해서 죽었고, 그렇게 해서 영원히 살아남았다.(학봉은 내 기억에 아마 임란 발발 이듬해인가 1993년 진주성에 있다가 병사했던가 그랬으리라) 

 

따라서 제대로 된 기록이라면 저 《징비록》 문제의 기술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임란이 발발하자 임금 선조는)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일본의 침략이 없다고 허위보고를 했다고 해서 잡아서 옥에 가두려 했으나 (압송한 김성일이) 서울에 이르기 전에 (죄를 용서하시고) 도리어 초유사로 삼았다"

 

(2015. 3. 6) 

 

***

 

한국역사학이 여전히 얼마나 당파적인지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간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성일 항목에서도 여실하거니와 이완재가 집필했다는 이 항목에서 이르기를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왜란 초에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경상도초유사慶尙道招諭使로 임명되어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나는 이것이 실록의 행장인지 20세기 역사학 서술인지를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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