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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경주 꺽다리 이채경 회고록》(3) 경주시 동천동 군부대 이전 예정부지 발굴이야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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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월 어느날 도시과에서 ‘도시계획시설 변경결정에 따른 의견조회’ 공문이 왔다. 내용을 보니 경주시 동천동 현 우방아파트 자리에 있던 육군 제○○부대 경주대대를 이전하기 위한 예정부지인 경주시 동천동 산 26-2번지 일대를 도시계획상 군사시설로 결정하기 위하여 각 부서에 의견을 조회하는 것이었다. 군부대를 이전하려는 부지라 면적이 약 4만 평이나 되었다. 그래서 ‘문화재 관련 전문기관에 의한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조치하여야 한다.’고 문화과의 의견을 회신하였다.

 

 

해가 바뀌어 1992년 초가 되자 육군 제○○부대 공병대 박모 중사가 찾아와서는 문화재전문기관이 어떤 곳이며 어디에 있는지 묻길래 경주에는 국립경주박물관, 경주문화재연구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이 있고 다른 지역에는 대체로 대학교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문화재전문조사기관인 법인 문화재연구원들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박모 중사가 다시 찾아와서는 경주 뿐만 아니라 대구 경북지역의 대학교박물관까지 모두 찾아가서 조사를 의뢰해봤지만 모두들 바빠서 할 수 없다고 하였다고 하면서 나중에 조사기관이 정해지면 그때 상세한 조사를 하더라도 우선 경주시에서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는지 사전조사를 좀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그 말을 들은 계장님과 과장님은 현장에 출장가서 현황파악이라도 해보고 오라고 하였다.

현장에 가서 살펴보니 기존에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하던 지역이 부지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전답 8천여 평, 구릉지대 및 임야 3만2천여 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는 4개 계곡, 군부대 막사 18동, 민가 2호 3동, 우사 2동, 계사 1동, 목장 1개소가 있었다. 임야 내에는 아까시나무 및 잡목이 주종을 이루며 능선을 따라 소나무들이 있었고 목장 내에는 밤나무가 다수 있었다.

 

92년인가 조사하고는 2002년에 보고서를 냈다? 문화재청에서 보고서 안 내면 가만 안둔다 협박하던 그 시점이다. 10년이 지나 무슨 보고서가 제대로 나오겠는가? 

 

지표상에서 육안으로 확인되는 문화유적은 대체로 능선을 따라서 고총고분이 줄지어 있었는데 산 27번지에 4기, 산26-2번지에 14기, 산26-1번지에 9기 등 총27기나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미 도굴되어 원형을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고분은 거의 없었다. 도굴 함몰부를 통하여 확인된 내부구조는 중·대형의 석곽·석실분들로서 7~8세기 신라고분들로 판단되었다. 또 고분 주위로는 민묘 130여기가 밀집하고 있었다.

결국 경주시청에 발을 들인지 만 2년도 안 된 햇병아리 학예연구사가 실질적인 지표조사를 한 셈이 되었다. 조사결과를 내부적으로는 시장님에게까지 상세히 보고하면서 이는 문화재보호법 제44조와 제74조에 의거 시행자부담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조치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시장님은 군부대 이전 문제는 우리시로서는 중대한 일이니 적법절차에 따라 최대한 빨리 조치되도록 잘 협조하여 주라고 말씀하셨다. 군부대에도 조사결과를 알려주면서 빨리 조사기관을 구해서 상세한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를 해야 한다고 통보하였다.

군부대에서는 발굴조사기관을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뛰어다닌 모양이다. 지금이야 문화재전문조사기관인 재단법인 문화재연구원이 많이 있어서 발굴기관을 구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군부대에서는 어찌어찌하여 대구대학교박물관을 조사기관으로 선정하여 1992년 10월 초에 동 부지 약 4만여 평 중 공사예정부지가 아닌 지역과 이미 원 지형이 훼손된 지역을 제외한 경주시 동천동 산26-2번지와 산27번지 일대의 부지 약9,800평과 고분 27기 중 18기를 대상으로 하여 발굴허가신청서를 접수하였다.

 

보고서에 수록된 유구 분포도인 듯한데 붉은 점이 조사한 지점을 표시하는 듯

 

1992년 11월 21일(토)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지금의 사적분과와 매장분과를 합친 분과) 10차 회의에 상정되어 심의하였으나 ‘소위원회 심의’ 후 논의하기로 하고 보류되었다.

다음주인 11월 27일(금)에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손보기(연세대) 문화재위원과 강인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문화재전문위원을 현지조사위원으로 모시고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경주시에서는 당시 서용봉(문화재계장), 이채경(학예사)이, 군부대에서는 박모 중사가, 대구대학교박물관에서는 이희돈 선생 외 2명이 현장에 참석하였다.

현장을 둘러보고 부대막사 등 건물배치계획을 설명들은 다음에 손보기 위원이 군부대 박모 중사에게 다짜고짜로 이 고분을 다 파 뒤집어서 어쩌겠다는 것이냐고 마구 소리를 높혔다. 그러면서 주 능선 고분은 절대로 발굴해서는 안 되고 그대로 현장에 보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모 중사가 그렇게 되면 부지에 막사를 지을 면적이 모자라고 훈련장을 만들 공간이 부족하다고 하자 손보기 위원이 역정을 버럭내면서 무슨 소리 하느냐고, 설계변경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이 고분을 모조리 발굴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그 자리에서 못박았다.

결국 12월 11일(금)에 열린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 11차 회의에 상정되어 심의하였으나 부결되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시장님께까지 상세히 보고드렸다.

 

 

 

해가 바뀌어 1993년 1월 중순이 되자 군부대 박모 중사로부터 부대 공병참모님이 며칠 후에 시장님과 면담을 하고자 시장실에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을 대비하여 군부대 이전예정부지에 대한 지금까지의 진행과정이 포함된 상세한 설명자료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며칠 후 시장실에서 이원식 경주시장님과 군부대 공병참모인 공모 대령과의 면담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는 서용봉(문화재계장), 이채경(학예사), 군부대의 박모 중사가 배석하였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서로간에 오고간 다음에 먼저 시장님께서(이미 잘 아시고 계시면서) 나에게 현황설명을 하라고 하시기에 그간의 진행과정에 대하여 조목조목 짚어가며 상세히 설명드렸다.

시장님께서는 “잘 들으셨죠?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발굴조사를 해야 한답니다.” 그러자 공병참모가 대뜸 “우리는 그 발굴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는게 아닌가. 그러자 시장님께서 “아니 그러면 어쩌려고 그러시오?”라고 하니 공병참모가 말하기를 “병력동원해서 아무도 현장에 접근할 수 없도록 경계를 세워놓고 중장비로 다 파내버릴겁니다.” 라고 공갈을 놓았다.

그러자 시장님의 안색이 갑자기 싹 바뀌더니 바로 직격탄을 쏘았다. “그래요? 어디 좋을 대로 한번 해보세요. 그렇지만 어깨에 붙어있는 그 대령 계급장이 과연 며칠이나 가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 그러자 기세등등하던 공대령의 안색이 갑자기 백짓장처럼 사색이 되더니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 한마디 못한 채 사지를 덜덜덜 떨고 있는게 아닌가.

나는 시장님의 갑작스런 직격탄에도 깜짝 놀랐지만, 명색이 대한민국 육군대령이 말 한마디에 저렇게 벌벌 떨고 있는 모습에 더욱 놀랐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하여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 잠시 뒤에 시장님은 혀를 끌끌 차면서 “거 실무자들하고 잘 의논해보세요.”라고 하시고는 먼저 나가버리셨다. 그날 이후로 공대령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고 박 모 중사만 뻔질나게 오갔다.

그리하여 지난해의 문화재위원 및 전문위원 현지조사시의 요구사항을 모두 반영하기 위하여 수 차례 설계변경을 거쳐 [경주시 동천동 산26-2번지의 고총고분이 집중 분포한 주 능선은 그대로 두어 고분공원을 조성하여 군부대에서 관리한다는 조건으로 군부대 내에 보존키로 하고 어쩔 수 없이 공사구간에 포함되는 주 능선에서 벗어난 주변의 고분 4기(당초 고분 27기 중 18기 발굴계획)를 발굴하고, 당초 계획에는 이미 토지의 형질이 변경되어있어 제외되었던 379-1번지의 개발예정지역이 포함된 2만3천 평에 대한 유구의 존재여부를 확인키 위한 시굴조사를 실시하는 것]으로 발굴계획을 변경하여 발굴허가를 신청하였다.

1993년 6월 18일(금) 문화재위원회 제3본과 6차회의에서 가결되어 우여곡절 끝에 발굴조사가 허가되었고 1993년 7월 16일부터 11월 2일까지 110일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시굴조사지역에 포함되었던 밤나무단지는 시굴조사 후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고분군이 형성된 주 능선에서 벗어난 4기의 고총고분은 모두 고려~조선시대 분묘로 추정되었으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성격을 규명할 수 없었다. 밤나무단지 약 2만 평에서는 고려~조선시대 분묘 345기가 확인되었는데 이 가운데 유물이 출토된 분묘는 52기였으며 유물은 토기병류 14점, 청동합류 9점, 시저 15점, 관정 40점, 옥장식 검, 동경, 토우 등 각각 1점, 기타유물 24점이었다.

 

보고서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오른쪽 유물이 뭔지 모르겠다. 고려시대 유물이 아닌가 한다. 

 

유물 가운데 고려시대 옥장식 검은 상당히 특이한 유물이었다. 서쪽 능선상 무연고분묘는 이장시 조사단 입회 하에 이장업자가 처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2개체분의 청동합이 출토되어 수습하였다. 지표상에서는 청동기시대 마제석부와 환상석부, 고려~조선시대의 토기병, 자기편, 와편 등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발굴조사된 성과를 담은 발굴조사보고서가 조사가 완료된 후 9년이 지난 2002년 7월에 발간되었으며, 보존조치된 7~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 능선의 고총고분들은 지금도 군부대 내에 보존되어 있다.

세월이 흘러 2018년 어느날 이제 80이 넘은 노인이 된 이원식 전 경주시장님을 사석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때 일이 생각나서 “그때 시장님께서 군부대 공병참모인 공대령에게 어째서 그렇게 살시게(강한) 직격탄을 날렸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공대령이 시장님 그 말 한마디에 그렇게 벌벌 떠는데 뜻밖에 너무 놀라고 한편으로는 우스웠습니다.”라고 했더니 시장님은 껄껄 웃으시다가 “그때는 말이지 내가 그 군부대를 산속으로 내보내려고 자주 2군사령관, 군단장, 사단장들과 만나서 협의하고 식사와 술자리를 마련하곤 했었는데 그까짓 대령 따위가 내 눈에 들어오기나 했겠나, 좋은 말로 시에서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택도 없는 공갈을 치길래 한방에 날려버렸지.” 하시고는 껄껄껄 웃으셨다.

시장님은 그때 2급 이사관의 관선 경주시장이셨는데 1993년 3월 15일 1급 관리관으로 승진하여 경상북도 부지사로 영전하셨다가 1995년 7월 1일부터 2002년 6월 30일까지 만 7년동안 민선 1, 2기 경주시장으로 재임하셨다.

시장님은 1989년 7월 1일 제23대 관선 경주시장으로 부임하셨으니 관선으로 재직한 만 3년 8개월 15일을 더하면 만 10년 8개월 15일을 경주시장으로 일하셨는데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높은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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