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경주 꺽다리 이채경 회고록》(4) 니 배때지엔..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8. 16.
반응형

지난 31년 간의 이야기들

4. 경주시 동천동 건물신축부지 발굴조사 이야기 – 니 배때지에는 칼 안드가는 줄 아나? -

1997년 1월 23일 오후 2시. 이날은 겨울이지만 날씨는 대체로 맑고 포근한 날이었다.

지금의 경주시청 서편에 있는 경주시 동천동 789-10번지 건물신축부지 공사현장에 매장문화재 입회조사를 나갔다.

이 지역 일대는 1984년에 이미 동천 제4지구 토지구정리사업이 완료된 지역이어서 각종 개발사업이 시행될 경우에도 처음부터 발굴조사를 선행시키지 않고 시청의 학예사가 현장에 입회하여 매장문화재 분포유무룰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 조치하는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매장문화재 분포지역으로 확정된 지역도 아니었고 또 구획정리과정에서 높은 곳은 깎이고 낮은 곳은 메워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발굴조사를 선행시키기에는 부담이 큰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매장문화재가 집중 분포하는 구 시가지 지역이 아니라 분포가 상대적으로 적은 북천 건너의 신시가지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전에도 곳에 따라 입회조사를 나가보면 구획정리과정에서 이미 원 지반이 깎여나가 지표에서 바로 생토층이 확인되는가 하면 북천의 범람으로 유실된 지역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지도 건축과에서 업무협의가 왔을 때 기초터파기시 문화과 관계공무원 입회하에 시행하도록 조건부 협의를 했던 곳이었다. 더구나 1995년에 이 부지에서 50m정도 떨어진 791번지에서 건물지 등이 발굴조사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주의가 요구되었다.

이때에는 필요한 현장의 입회조사를 시청의 학예사가 하였다. 지금처럼 재단법인 문화재전문기관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국립경주박물관, 경주문화재연구소,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에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민간의 입회조사를 해주지 않았다.

현장에 나가보니 여러 사람이 만반의 공사준비를 갖춰놓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는 바로 조사가 시작되었다. 제발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를 기원하면서(뭐라도 나와서 발굴조사로 넘어가게 되면 그 뒤치닥꺼리가 골치아프니까) 조사를 시작하였다.

 



내가 작업지시를 하기를 굴삭기로 부지의 한 가운데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10cm 깊이로 긁으라고 하였다. 토지구획정리사업 이후 계속 나대지로 방치된 상태에서 이웃 주민들이 소규모 텃밭으로 부분경작을 했던 지표층의 최상단부가 확인되었다.

두 번째로 다시 10cm를 낮추어 긁었으나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로 다시 10cm를 낮추어 긁었더니 부지 가운데 쯤에서 기와편이 와르르 쏟아지면서 고분에서나 나오는 철정鐵鋌 1점이 노출되었다.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현장사진을 찍고 비닐을 가져오라고 하여 유물이 출토된 지점을 덮어 보존시킨 다음에 현장을 그대로 원래의 상태로 다시 매몰하였다.

 



그리고나서 건축주와 공사관계자들에게 “보시는 바와 같이 매장문화재가 확인되었으므로 이 현장은 지금 그대로 현장을 보존조치하여야 하며 문화재보호법 제44조와 제74조에 의거 전문기관에 의뢰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조치하여야 합니다.”라고 설명하자마자 앞쪽에서 어떤 사람이 후다닥 튀어나오더니 다짜고짜로 “야! 이 새끼야! 니 배때지에는 칼 안 드가는 줄 아나?”라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마음을 진정시켜 다잡고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서 차분하게(이럴 때 흥분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자칫 일이 엉망이 된다.)

“선생님 오늘 저하고 처음 만났죠?”

그 사람 머쓱해 하며 “네 그렇니더”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저도 오늘 선생님 처음 만났습니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발굴비용 추가로 들어가야 되지요, 공사기간 늦어지지요, 그 사이에 자재값 오르지요, 공사비 오르지요, 대출이자 나가지요, 얼마나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지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저도 아까 시작하면서 제발 아무것도 나오지 말고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이렇게 문화재가 나와버렸습니다. 저는 문화재 업무를 보는 담당 공무원입니다. 공무원이란 법을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공무를 수행하러 여기에 나왔고 공무수행 중에 부득이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제가 선생님하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것도 아니요,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고 저는 공무를 수행하여야 합니다. 그래도 저를 찔러야 되겠다면 그렇게 해보세요.”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금새 “아이고 미안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더니 “아이고 이거 큰일 났네. 어쩌면 좋겠습니까? 다른 좋은 방법은 없겠습니까?”라며 매달렸다. 나는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하루라도 빨리 발굴조사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바로 현장을 떠나 사무실로 복귀하면서 사진관에 들러 카메라에서 필름(이 때만해도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전이었다.)을 빼내어 현상 및 인화를 시켜놓고는 사무실인 시청 노동동청사(그 때는 경주시와 경주군이 통합한지 얼마지나지 않았을 때라 시청사가 2곳으로 분리되어 있었다.)로 복귀하자마자 출장결과보고서와 현장보존조치하고 발굴조사를 실시하라는 명령 공문을 한꺼번에 만들어서 국장까지 결재하여 공문을 우편으로 긴급발송하여 버렸다.

그리고 10여분 뒤에 시장실에서 전화가 왔다. 동천동 현장에서 무슨일이 있었느냐고... 그래서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어떻게 조치했냐고 하길래 현장보존조치 명령공문이 이미 발송되었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에 부시장실에서 같은 전화가 왔길래 같은 대답을 하였고, 또 잠시 뒤에 국장실에서 전화가 와서 같은 말을 하길래 “아까 국장님께서 결재하신 바로 그 공문이고요, 이미 공문 날아갔습니다.” 라고 했더니 “이 사람아 그렇게 빨리 했나?”라고 하길래 “국장님 이런 일은 틈을 주면 바깥 바람 들어와서 안됩니다. 최대한 빨리 해치워야 합니다.”라고 했더니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에 그 현장에서 만났던 다섯사람이 사무실에 왔다. 어찌해야 하느냐고 어디가서 발굴조사를 해달라고 하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발굴조사기관이 부족하고 다들 바쁘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경주문화재연구소에 가서 해준다고 할 때까지 생떼를 한번 써보라고 하였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물러갔다.

그리하여 1997년 3월 7일자로 발굴조사가 허가되고 3월 11일부터 4월 11일까지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담장 기초석렬 2개소, 우물 2개소, 건물지 2개소, 노지(爐址) 1개소, 석곽형 유구 1개소, 잡석무지 1개소가 확인되었으나 모두 많이 파괴되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출토유물로는 기와류 3점, 자기류 13점, 금속류(철정, 철부, 자물통) 3점, 석제품(활석제 용기뚜껑 3점, 초석 2점, 이형석재 1점, 문둔테석 1점) 7점 등 총 26점이 수습되었다.

다음해인 1998년 12월 국립경주문화재연고소에서 발간된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긴급발굴조사보고서Ⅲ)』에 「경주 동천동 789-10번지 건물신축부지내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보고되었다.

 

*** 台植補 ***

저 발굴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술연구총서23 《문화유적발굴조사보고서(긴급발굴조사보고서Ⅲ)》, 1998에 수록됐다. 검색할 적에 유념했으면 싶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저 이름으로 보고서 전문을 pdf 서비스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