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도 이젠 팔순을 앞에 두고 있다. 서울중고 1953 입학동기가 400명인데 150명 죽고 250명 남았단 말을 한다. 십년전부터 친구들 부고가 정신없이 날아든단다.
한국문화재엔 유홍준이 있기전에 김병모가 있었다. 1978년 옥스퍼드대 박사학위를 들고 나타난 그를 창산 김정기가 다시 불렀다.관리국 상근전문위원으로 가니 7년만의 친정복귀였다.
한국일보 강대형 기자가 옥스퍼드대 고고학 박사가 나타났다고 기사를 썼다.
직후 김병모는 전화 한통을 받는다. 한양대 재단이었다.
김연준(1914~2008) 이사장을 면담한지 두 시간. 김연준은 교무처장을 부르곤 그 자리서 김병모를 사학과 교수로 발령냈다.
하지만 그의 한양대 취임은 이듬해 2월로 늦춰진다. 그 이유를 선생은 "상근위원 계약기간 때문이었다"고 한다.
(2016.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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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인터뷰는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17년 1월호에 수록되었으니, 그 원문은 아래에서 제공한다.
그 원문은 인용한다. 참고로 당시 나는 연합뉴스에서 해고되어 야인, 간단히 백수로 있을 때다.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이라 소개했지만, 개털이다. 뭔가는 직이 있어야겠기에 가라로 붙인 거다. 하긴 그때 나는 저 연구원 등기이사였다.
고고학도를 탄생시킨 잊지 못할 문화재관리국 시절
고고학자로의 첫발을 디디다
선생을 알고 지낸 지 대략 20년. 선생은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을 설립해 11년째 운영 중이다.
서울 토박이인 선생은 ‘낙원동 기와집’에서 1940년 양력 9월 21일 6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1961년 개설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1회 입학생이다. 입학동기는 10명. 그중 6명이 교수를 지냈다.
모교 고고미술사학과에 정착한 임효재·안휘준 교수와 정영화 영남대 교수, 손병헌 성균관대 교수 등이 그들이다. 이 중 손 교수는 선생의 서울고 2년 후배.
항간에는 손 교수가 입학 동기라고 선생과 맞먹으려 했다가 혼이 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내친 김에 그런 “손 교수님을 손을 좀 보셨다면서요?”라고 묻는 말에 웃어넘기니 아마 사실인 듯했다.
제대한 해 1968년 10월, 선생은 문화재관리국에 학예원으로 들어갔다.
“지명 공채였어. 몇 명만 시험 본 거야. 삼불 선생이 그렇게 했어. 학과 1년 후배들인 지건길과 이종철이 동기야. (역시 1년 후배인) 조유전은 그 이듬해에 들어오고.”
삼불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스승인 김원룡의 호. 지건길은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장, 이종철은 국립민속박물관장, 조유전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역임한다.
학예원이란 9급 공무원 정도에 해당한다. 6개월 뒤 그는 학예사보로 승진한다.
“당시 계장이 정재훈 사무관이었어. 이 분이 날 잘 봤어. 학예직이지만 행정을 알아야 한다고 했거든. 그때 경험이 훗날 많은 도움이 됐어. 요즘 학예직이 행정에 약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행정을 알아야 해.”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경복궁 서문 앞 창성동에 청사가 있었다. 정재훈은 이후 승승장구하고는 문화재관리국장을 역임한다. 한국 문화재 행정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때도 그렇게 정 국장이 똑똑했냐는 물음에 “박학다식했지. 모르는 게 없었어. 그분이 사학과 같은 출신이 아닌 걸로 아는데 독학으로 공부한 거야.”라고 말한다.
그가 문화재관리국에 발을 디디고 실무를 익혀가던 무렵, 문화재연구실이 생기고 그 초대 실장에 국립박물관에 있던 창산 김정기 박사가 온다.
“연구실 만드는 문서 기안을 내가 했어. 정재훈 선생이 만들라고 하더라고.”
연구실이 생기면서 선생 또한 연구실로 옮겼지만, 정재훈 계장이 서무과로 데려다가 다른 일을 시켰다고 한다.
세계에서 넓혀간 고고학에 대한 열정
그의 문화재관리국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71년 1월 이탈리아 문화재보존센터로 연수를 떠나면서 사실상 막을 내린 것.
“당시 불국사 복원 문제로 이탈리아 문화재보존전문가를 초빙한 거야. 내가 영어 통역을 했어. 이것이 인연이 돼서 이 분이 연수를 주선한 거지.”
한데 문제가 생겼다. 문화공보부에서 이런 전례가 없어, 할 수 없이 영어 시험만으로 연수자를 선발하게 된다.
“시험장에 갔더니만 국립박물관 정○○ 선생하고, 우리 문화재관리국 이○○ 선생이 시험 보러 왔더라고. 그분들은 내가 건방지다 생각했을 거야. 선배한테 양보하지 않는다고. 그 시험이 나 때문에 마련된 걸 그분들은 몰랐을거야.”
결국, 그가 선발되어 휴직계를 내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연수는 6개월 과정이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탈리아 연수가 끝나고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처음에는 런던대에서 공부하고는 나중에는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런던에 있을 때였을 거야. 71년 10월 무렵인가 김정기 실장님이 편지를 나한테 보낸 거야. ‘손병헌을 쓰고 싶은데 네가 자리를 비워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어. 난 기꺼이 사표를 써서 보냈지. 고등학교 후배가 내 자리에 들어온다는데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어?”
그는 문화재관리국 시절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고고학도 김병모는 이때 만들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란다.
특히 김정기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고고학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고고학 박사 1호다. 이런 그를 귀국하자마자 창산이 다시 불렀다.
문화재관리국상근전문위원을 역임했지만, 이 생활도 오래 하지는 못한다.
“귀국 직후 한국일보 강대형 기자가 대문짝만하게 나에 관한 기사를 썼어. 옥스퍼드대학 고고학 박사가 탄생했다고. 그걸 보고 한양대 김연준 이사장이 만나자 연락이 왔어. 두 시간 정도 면담했나? 교무처장을 오라 하더니 그 자리서 사학과 교수로 발령을 내더라고.”
하지만 문화재관리국과의 의리를 지키고자 이듬해 3월까지 전문위원으로 일하고는 한양대로 옮긴다.
1999년 문화재청이 만든 특수대학 한국전통문화학교가 개교하자, 초대 총장에 취임해 4년간 봉직한다. 이래저래 문화재청과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질긴 인연이다.
글+사진‧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
그가 연수한 이탈리아 기관이 이크롬 ICCROM 이다. 저 무렵 더러 문화재계에서 저짝으로 연수를 한 것으로 나오는데, 관련 자료들이 저짝 기관에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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