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일본사가 한국사보다 어마어마하게 잘 났기 때문에 근대화에 저쪽은 성공하고 이쪽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수천년에 걸친 양국 교류사에서 한국이 문화적으로 항상 전수자의 입장에 있었던 것도 옳고, 또 서로 비슷한 수준으로 영향을 주고 받았던 역사도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8-19세기.
에도시대의 일본에 대해서는 우리가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를 놓고 한국사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저쪽은 왜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도 끈기 있게 달라붙어 연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18-19세기. 에도시대 후반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 중 하나는,
흔히 말하는 학문적 동향. 특히 난학과의 관련인데.
이 문제에 있어 몇년도에 일본인들이 무슨 측량법을 받아 들였다던가,
근대적 인체해부를 완성했다던가 하는 그런 팩트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는 18-19세기 이 시대에 근대과학적 사유와 방불한 인문적-자연과학적 전환이 지식인들 사이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바-.
이 시기에 바로 "근대과학적 사고의 맹아"가 일본 사회에 싹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불과 한 세대 만에 일본의 과학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여, 1900년대 벽두가 되면 벌써 세계적 수준의 학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이 한 세대에 걸친 노력만으로 가능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18-19세기. 이 시대를 그래서 주목해야 한다 그 말이다.
이 시대는 실제로 "일본 근대과학"이 배태되고 발전한 시대다.
20세기 내내 양국사이에 보인 자연과학-인문학 수준차는 실로 18-19세기에 양국사에서 배태되었다고 보아도 좋다고 보며.
바로 이러한 일본 지성사의 흐름을 포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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