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앞에 쓴 데라코야 이야기가 좀 부족해서 보탠다. 결국 일본 전근대 교육기관이 어떻게 근대적 교육기관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 이를 시리즈로 만들어 글을 남긴다.)
일본이 앞서 데라코야를 대폭 소학교로 전환한 이야기를 했다.
이를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일본은 역시 전통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구나.
그래서 데라코야가 소학교로 바뀌었지만 우리는 서당을 거의 초등교육기관으로 바꾸지 못했다. 우리도 반성하자.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일본이 스스로의 전근대문명이 귀중한 것이라 자각하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예를 들어 일본 미술.
전통 일본미술이 대단하다고 처음 인정한 것은 일본인이 아니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탈아입구"로 설명하지만,
"탈아"란 조선과 중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원래 "탈아"의 개념 안에는 "일본의 전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메이지 초기 일본의 전통적 문화는 모든 부분이 척결의 대상이었고 박멸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일본미술을 보자면, 마냥 서양의 것만 따라가서는 안 되며 일본 안에서 서양에도 통할 수 있는 미를 찾아야 한다고 일갈한 인물은, 일본인이 아니고 서양미술가 어네스트 페넬로사 (Ernest Fenellosa)였다.
1878년 일본미술의 문명개화를 위해 불러온 서양미술가가 되려 일본의 미를 찾아야 한다고 일갈함으로써 일본인들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우키요에고 일본화이고 간에 그 미를 개척하고 발견하게 된 것은 바로 그 후부터였지 메이지 초기 일본은 일본의 것을 지키고 어쩌고 할 심리적 여유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데라코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일본의 전통 초등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지킨 것이 아니라 소학교를 설치할 돈도 없고 교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간단한 방법-. 우리로 치자면 서당 훈장을 소학교 선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전근대적인 교육기관을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 포장해서 임기응변하는 것은 데라코야만이 아니었다.
메이지 시대의 교육은 전근대 교육기관의 분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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