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제(1899~?) 장기려(1911~1995) 두 분은 해방전 이미 의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고 해방이후에도 한국의학의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이 분들은 사제지간으로 외과 전공이다. 따라서 프로필도 비슷하다.
한국의학계는 해방 이전 크게 경성제대 의학부, 경성의전, 세브란스의전에서 조선인 의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백인제 장기려 두 분은 이 중 경성의전 졸업자를 대표한다.
백병원 설립자로 유명한 백인제 선생 프로필은
오산학교 졸업 (1915)-- 경성의전 (1916-1921)-- 조선총독부의원 근무 (1921-1923)-- 경성의전 외과학교실 교수 (1927-1941)-- 동경제대 의학박사 (1928)-- 백인제외과의원 (1941-)-- 경성의전 및 서울의대 외과 교수 (1945-1950)-- 1950 납북
이와 같다.
경성의전 1기로 의전 출신중 가장 빠르고 1919-1921년 사이에 3.1 운동 참가로 퇴학되었다가 복학된 기간이 있다.
의사면허도 총독부에서 바로 내주지 않아 졸업후 1923년에야 받았다.
장기려 선생 프로필은
송도고보 (1928)-- 경성의전 (1928-1932) -- 경성의전 외과학교실-- 평양 기휼병원 외과 (1940)-- 나고야대 의학박사 (1940) -- 평양의대 외과과장 (1947)-- 서울의대, 부산의대, 가톨릭 의대 외과학교수 등이다.
경성의전은 고보를 졸업하면 바로 응시할수 있었고 4년제였다.
예과를 거쳐 입학하는 경성제대 의학부와 비교하면 예과 2년이 없었지만 본과는 4년으로 동일했다.
이때문에 해방이후 경성의전과 경성제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경성의전 출신을 경성제대와 동일하게 대우하지 않으면서 국대안이 촉발되었다.
국대안 파동이 커진 이유 중 가장 심각했던 부분이 경성의전과 경성제대 의학부 간 갈등이었다.
대개 이런 사건의 경우 대의명분보다는 이런 갈등이 커져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유명한 일본의 동경대 전공투에 의한 야스다 강당 사건도 촉발된 원인은 당시 동경대 부속병원의 인턴 관련 문제였다.
해방 이후 전문학교가 일괄해서 모두 대학으로 승격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성의전과 경성제대 의학부는 차별없이 통합이 옳았다고 보는데 경성의전을 새로 출발하는 서울대 산하 전문부로 편제하고자 하여 문제가 생겼다.
국대안 전반의 방향은 옳았다고 보는데 이 부분은 잘못되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전문학교를 일제시대에 장기간 대학으로 승격하지 않고 두었던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던 이상 경성의전과 경성제대 의학부는 구별 없이 통합했었어야 옳았다고 본다.
실제로 두 학교는 의학교육 기간은 4년으로 동일했고 의사면허 취득후에도 의사로서 차이 없이 활동했다.
당시 서울대는 양자간 갈등을 봉합하면서 경성의전 출신이 추가로 2년 예과 교육을 받아오면 의학사 학위를 주겠다고 했다는데, 이건 제대로 된 해결 방법이라 볼 수 없다.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많은 장면이다.
P.S.1) 두 분 모두 의학박사를 동경제대와 나고야제대에서 취득했는데 당시 일본에는 대학원과정에 들어가지 않고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를 받는 제도가 있었다고 안다.
일본에서 이 논문박사 학위는 최근까지도 계속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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