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혁에 이어 이제 일제시대의 좌파 지식인에 대해 써 보겠다.
남로당계와 북로당계를 나누어 쓴다.
이 두 계열은 많은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로 교육경력의 차이를 무시 못한다.
남로당 계열에는 당시로서 고학력자가 많다.
남로당 박헌영은:
대흥보통학교 (1912-1915)-- 경성제일고보 (1915-1919)
보통학교 경력은 1년이 짧고 (당시 보통학교는 4년)
반면 고보 경력도 1년이 짧은 것 같은데 (당시 고보는 5년) 월반을 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박헌영 기록에는 경성제일고보 (뒤의 경기고)를 나왔다고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가 졸업할 때까지는 이 학교는 아직 경성고보였다.
경성제이고보(뒤의 경복고)가 생긴 후에야 경성제일고보로 이름이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는 경성고보가 정확한 이름이다.
경성고보건 경성제일고보건 간에 당시 조선인이 진학가능한 최고수준의 중등과정인 것은 맞다.
박헌영은 공부를 잘했다는 증언이 많고 특히 영어에 대단한 소질이 있었다는데 그가 북한에서 숙청당시 미국간첩이라는 죄명이 씌워지는 데도 일조했을 듯 싶다.
남로당 당원으로 제주 4.3 사건을 사실상 주도하고 해방 이후 강원도 지역 빨치산 활동을 하다 사망한 김달삼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대구공립심상소학교-- 일본 교토 세이호중학교(聖峰中学校)-- 일본 주오대 경제과
김달삼은 부친이 술도가로 큰 돈을 벌었다는데 그의 경력을 보면 그럴 듯하다.
일단 그가 다녔다는 대구공립심상소학교 자체가 일본인들을 위해 세운 학교이고, 중등교육은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에 들어가 받았다.
세이호중학교 졸업 후 주오대 경제과를 바로 들어갈 수는 없다. 아마도 주오대 예과나 전문과로 들어갔을 것 같은데 김달삼은 전반적으로 자료 자체가 매우 부실하다.
하지만 주오대 2년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간 정황이 있는 것을 보면, 주오대 입학 자체는 팩트로 보이므로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주오대 경제과를 들어갔다면 예과나 전문과 같지만 확실치 않다.
2년 재학중 학병으로 갔다면, 예과나 전문과를 마치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일본에 그의 학생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예과나 전문과 재학중 대전 말기 학병으로 끌려간 사람 중에는 일본에 기록이 없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으로 보인다.
P.S. 1) 김달삼은 주오대 2학년 재학중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에 지원하여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는데 이 부분은 추후에 검토하겠다. 필자 생각으로는 정황상 학병인 것 같아 본문에 그와 같이 기술하였는데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P.S. 2) 김달삼은 남로당 출신이지만 해방 이후 활동을 평가받아 북한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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