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병 출신에 대해서도 언젠가 자세히 써야 할 것이다.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계원과 공군 준장으로 순직한 김영환 양 장군은 두 사람 모두 학병 출신이다.
학병출신이라는 이름을 생소하지 않지만 이것처럼 오해가 많은 부분도 없다.
오해가 많으니 개인에 대한 평가도 들쭉날쭉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학병인데 항일운동급으로 추앙되고
어떤 사람은 똑같은 학병인데 친일파 급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보는 사람의 개인적 호불호가 평가에 개입한 탓이다.
학병은 그 자체는 70년대 강제징집이나 80년대 전방입소 등과 다를바가 없다.
원해서 간 것은 당연히 아닌데
학병이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끌려간것인지 온라인 상에는 제대로 정리된 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제대로 된 팩트의 확인부터 필요한 단계인데 논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언젠가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써 보겠다.
학군 출신 중에는 해방 당시 일본군 장교 신분이었던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학병이라는 것이 당초에는 장교로 쓰려고 데려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굳이 비교하자면 학병은 해방이후 학사장교와 유사하게 써먹으려고 일본군이 뽑은 것이다.
학병은 최소한 전문학교 재학 이상이어야 선발하였다. 애초부터 소학교 4년 교육 이상은 다 받아 간 조선지원병과는 처음부터 격이 달랐다.
일본인의 경우에는 학병은 거의 장교로 선발되었다던데 조선인은 학병으로 끌고 가 놓고는 막상 장교로 간 사람도 있고 사병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 예가 김수환 추기경이다. 학병이라고 해서 백프로 장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계원, 김영환 두 분은 학병으로 가서 장교임관을 한 사람들이다.
해방 당시 일본군 소위 신분이었다.
이런 경우 당연히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간 사람이나 일본 정규 사관학교 출신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흔히 "일본군 출신"이라 알려진 국군 고급 장성들 중에는 학병출신이 꽤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양반들 전체가 일본군이라고 매도되기도 한다.
친일파에 대한 논의야 어쩔수 없다 해도 원칙이라도 정확히 지키는 것이 좋겠다.
특히 우리나라는 친일파 딱지를 한번 붙여 버리면 생사를 막론하고 당사자의 명예에 큰 손상이 오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한 무죄추정의 원칙에 입각해서 보는 게 옳다고 본다.
김계원의 프로필은 이렇다.
배재고보-- 연희전문 상학과 (1942 입학)-- 학병징집 (1944?) -- 일본군 소위로 소집 해제 (1945) -- 군사영어학교 (1946) -- 대한민국 포병소위
연희전문 상학과는 원래 3년제였다. 문과와 수물과 등은 4년제였던데 반해 상학과는 1년 짧았다.
그런데 이 시기가 되면 문과와 수물과는 재학기간 단축이 있었는데 상학과는 원래 3년제라 어땠는지 모르겠다.
학병징집을 당한 정확한 연도가 확인이 안 되는데 아마 1944년 2월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희전문 2학년 재학중 (1943)에 징집영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연희전문을 졸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병에 끌려갔을 것이다.
그는 해방 후 연희전문을 졸업을 했는지 안했는지 불확실한다. 아무튼 그는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군문의 길을 걸어 참모총장 직위까지 올랐다.
김영환의 프로필은 이렇다.
경기공립중 (1938년) -- 간사이대 법과 (1944년 유학) -- 학병징집 (1944?) -- 일본육군예비사관학교-- 관동군 포병소위로 소집해제 (1945) -- 군사영어학교 (1946) -- 대한민국 육군 소위 -- 대한민국 공군
경기공립중이라는 건 원래 경성제1고보이다. 해방 이후에 경기고가 된 그 학교다.
경성제1고보가 3차 조선교육령 때 중학교로 바뀌면서 일본인들이 다니는 경성중 다음으로 경성제2중이 되는 대신 경기중이 되었다.
당시로서는 조선인 최고의 고보이다.
경기중 졸업이 38년인데 간사이대 법대 유학때까지 6년의 세월이 뜬다. 찾아봐도 전혀 보이지 않는데, 굳이 찾자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간사이대 법대 유학이 1944년인데 전문부인지 예과인지 불분명하다. 어느 쪽이라도 일단 당시까지 최종학력이 중졸이므로 본과 입학은 불가능하다. 전문부나 예과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학병 징집되어 포병소위로 임관했기 때문에 1944년 2월에 소집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유학이 1944년으로 되어 있어 혹 유학이 시작이 된 해가 착오가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유학을 가자마자 소집되어 끌려간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1944년에 학병을 간 사람들은 필자가 알기로는 1944년 2월에 일제히 소집되었다).
복잡한 사정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두 사람은 대학시절을 학병으로 마감하고 졸업을 못했다는 (김계원 선생은 불명) 점에서는 동일하다.
해방 시점에서는 학병 출신 일본군 소위였다는 점도 동일한데 해방이후 대한민국 군문에 투신하였다.
김계원 장군은 참모총장까지 올랐지만 김영환 장군은 1954년 비행중 순직하였다.
아. 김영환 장군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경력 때문에 사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학병, 공군 조종사, 문화훈장. 잘 어울리지 않는 프로필이지만 그만큼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다 세상을 떴다 할 것이다.
순직 당시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순직 후 공군 준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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