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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일주서逸周書 세부해世俘解가 말하는 주 무왕시대 인신공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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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새크리파이스



4월 22일 경술庚戌의 새벽에 무왕은 은허의 주족 사당에서 성대한 요제燎祭를 거행했다.

수레를 타고 도착한 뒤에 그는 종묘의 남문 바깥에 섰고, 사신史臣이 상제에게 제사를 바칠 테니 왕림하여 흠향하시라고 통지하는 제문을 낭독했다.

우선 100명의 ‘대아신大亞臣’—주왕을 위해 목숨을 건 고급 무관武官—에게 전문적인 제례복[佩衣]으로 갈아 입히고, 무왕이 직접 제사에 바쳤다.

집행 방식은 ‘폐廢’이니, 손발을 잘라서 핏물 속에서 뒹굴고 비명을 지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비명이 하늘에 전달되면 상제가 만족스럽게 제수품을 흠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태사 여상이 다른 40명을 바쳤는데, 그들은 주왕에게 충성한 상족의 씨족 수령[家君]과 점술을 담당한 관리[貞師], 사도(司徒)와 사마(司馬) 등의 하급 관리였다.

인간 희생들은 몸부림치다가 죽기 직전에서 머리가 잘렸을 것이며, 그런 뒤에 종묘 안으로 옮겨져서 제사에 바쳐졌을 것이다.

개중에 몇몇 시체는 또 큰 솥에 삶아졌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상나라 왕실 가족의 머리였다. 주왕의 머리는 ‘태백기’ 아래에, 달기와 다른 비빈의 머리는 붉은 깃발 아래에 걸려 있었는데, 태사 여상은 이 양쪽의 인두人頭를 건 깃발을 메고 종묘로 들어갔다.

이전에 있던 인두와 새로 들여온 인두는 모두 불구덩이에 던져져서 태워짐으로써, 타는 냄새를 품은 연기가 구름 속으로 올라갔다. 이것이 상제가 하늘에서 제수품을 흠향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닷새 동안 제사는 계속 거행되었다.




23일 신해辛亥에는 주나라 선조에게 제사 지냈다.

태왕太王 고공단보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장자인 태백(泰伯, 太伯)과 둘째 아들인 우공虞公 중옹仲雍, 셋째 아들인 왕계王季 계력季歷, 다시 문왕과 백읍고로 이어졌다.

악대의 반주 속에서 그들의 신위가 차례로 제단 위로 운반되었고, 무왕은 청동 도끼를 손에 들고 조상에게 은상의 죄악이 이미 대가를 치렀음을 보고[維告殷罪]했다.

마지막으로 ‘천부은왕정荐俘殷王鼎’, 그러니까 상나라 왕의 큰 솥에 삶은 포로를 바쳤으나, 자세한 수량은 알 수 없다.

24일 임자壬子에 무왕은 천자의 전용 복식인 ‘곤의衮衣’로 갈아입고 종묘에 갔으니, 이것은 그가 이미 왕조의 정식 주인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날 거행한 제사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25일 계축癸丑에는 주왕 휘하 무사 100명을 제사에 바쳤다[荐殷俘, 王士百人]. 무왕은 손수 청동 도끼와 창[戈]을 들었고, 의식이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서 악대가 악곡을 연주했다고 했으니, 무왕이 직접 제물을 바쳤을 수도 있다.




26일 갑인甲寅에 무왕은 붉은색과 흰색의 전포戰袍를 입고 목야의 전장에서 전사한 동맹군들을 위해 제사를 올렸고, 악대는 〈만무萬舞〉라는 곡을 연주했다.

이것은 상나라 귀족이 도끼를 휘두르며 전투하는 것을 연습할 때 사용하던 악무樂舞였는데, 이미 주나라가 접수한 듯했다.

27일 을묘乙卯에 악대는 〈숭우생계崇禹生開[啓]〉—대우大禹의 아들 계啓가 하나라를 개창開創한 것을 나타낸 음악일 수 있음—를 연주했고, 무왕은 이것을 빌려 자기가 태자 주송周頌을 책봉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당시 주송은 겨우 두세 살이었을 터인데, 그에 앞서 읍강은 단지 딸만 낳았을 뿐이었다.

의식에서 먼저 봉헌한 것은 후래侯來와 진본陳本 등이 주변을 정벌하여 획득한 적의 수급이었으며, 아울러 현장에서 도살한 가축을 곁들였으니, 소 6마리와 양 2마리였다.

그런 뒤에 하늘(상제)과 후직에게 제사를 바쳤는데, 여기에는 소 504마리가 사용되었다. 다시 다른 모든 신들과 물과 흙의 신에게 제사를 바치면서 돼지와 양 등 가축을 모두 3,701마리나 사용했다.

이런 규모의 제사는 200년 전의 무정武丁 시기와 비견할 만했다.
  
세상에 전해지는 역사서에는 상고시대에 인신공양제사 행위가 있었음을 기록한 게 거의 없으므로, 《일주서逸周書》 〈세부해世俘解〉에 기록된 무왕의 이 제사 기록은 상당히 놀랍고 두렵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이 보여주는 상나라(와 더 이른 시기)의 각종 인신공양제사 유적과 갑골문의 기록은 《일주서》 〈세부해〉의 내용과 대단히 잘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무왕의 인신공양제사는 완전히 상나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李碩, 《翦商》에서

***

이상 인제대 홍상훈 선생 옮김이다.

근간 <상나라 정복翦商: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글항아리)이란 책 원고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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