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이 글을 굳이 "관전법"이라고 쓴 까닭은 필자가 이 분야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관전이라는 말은 직접 뛰는 플레이어가 할 소리는 아니다. 관중석에 앉은 사람이 쓰는 말이다.
필자가 관전의 재미를 위해 나름의 독법을 적는 것이니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앞서 쓴 글을 이어서 쓴다.
일본의 경우, 최근 교과서를 보면 임나라는 말은 잘 쓰지 않고 가야라고 표기해 놓은 데가 많다.
왜 가야라고 쓰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중요한 점은 위에 표시된 가야 영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야 영역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서쪽으로 더 길어 전남 지역이 가야에 포함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가야로 표시된 영역은 사실 일본의 전통적인 임나일본부설의 "임나"와 동일하다.
구체적으로는 소위 임나 사현이 백제에 할양되기 전의 "가야=임나" 영역으로 일본사에서 볼 때 서기 475년 경 한반도 남부 판도에 해당한다.
여기서 지금 영산강 유역에 모루牟婁·상다리上哆唎·하다리下多唎 셋을 적어 놓은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곳과 기문己汶과 대사帶沙 등 전남북 일대가 왜측의 배려로 백제에 할양되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일본서기의 "임나사현 할양"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일본사에서는 전남북 일대 전체를 임나사현이라고 보기 때문에 할양 이후 가야=임나 영역이 위 그림에서 기문·다사·상다리·하다리·모루가 빠진 모양으로 축소되었다고 본다면 전남북 일대 전체가 그 전에는 가야 영역에 있다가 (구체적으로는 왜의 영향권 하에 있다가) 백제에게 넘어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주장이 현대 일본학계 공식 주장이다. 이 그림 어디에도 임나일본부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이 그림이 그리는 당시 한반도 남부에 대한 이해는 임나일본부 시대에 구축해 놓은 논리 거의 그대로 답습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위 말하는 "임나사현" 영역을 빼고 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소위 "후기가야" 연맹과 아주 그림이 비슷해진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역사에서 배우는 "후기가야의 영역"이라는 것은 일본사에서 볼 때 임나사현의 할양이 있던 서기 512~513년 이후의 가야=임나가 되겠다. (물론 할양만 문제가 아니라 신라의 가야 영토침탈도 가야연맹 영토의 축소에 영향이 있다).
일본은 512~513년에 임나사현이 백제에 할양되었으므로 전남-전북은 비로소 이때 백제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반면 한국사에서는 근초고왕 연간에 이미 백제가 전남북 일대를 편입했다고 판단하며 임나사현도 전남북 동부지역이라고 보고 있으므로 한국과 일본의 시각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겠다. (계속)
***previous article ***
"임나사현任那四縣의 위치" 관전법 (1)
*** 편집자注 ***
필자는 지금의 전남북 일대로 보는 소위 "임나사현" 영역을 빼고 나면 임나일본부 판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소위 "후기가야" 연맹과 아주 그림이 비슷해진다는 점을 흥미롭다고 지적한다.
나는 이를 적대적 변용이라 부른다. 해방 이후 식민사학 청산이라는 기치를 내건 한국민족주의 역사학이 가야를 내세워 그 극복을 했다고 주장하거나 자랑하지만, 실은 주어를 바꾼 데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임나일본부를 운영한 주체를 이른바 식민사학이 倭로 내세운 주어를 백제 혹은 가야로 대체한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실상 임나일본부설과 한국민족주의 역사학이 그린 가야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가야는 아무 데나 주어도 되는 물건이 아니다. 왜에 준 것이 맘에 안 든다고 백제에다 떼어다 주었는가 하면, 가야 주체 역사학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또 왜나 백제조차 아예 떼어버리고 그 자리에 가야를 갖다 놓았을 뿐이다.
물론 이 중에서도 가야 주체 역사학은 가야를 비로소 주체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대서특필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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