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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그 이웃

자기 나라 무덤 파면서 일본 눈치를 봤던 중국

by 신동훈 識 2026.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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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온 이야기가 나온지라 필자도 아는 한에서 써 본다면, 

70년대까지 일본의 동양사에 대한 위세가 얼마나 컸는가 하면, 

마왕퇴 발굴 당시 중국은 처음 발굴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보고서가 나올 때까지 줄곧 일본의 반응을 엄청나게 의식했다. 

마왕퇴 발굴에는 주은래와 곽말약, 

특히 일본에서 의대를 나온 곽말약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세상 돌아가는 것과 담쌓고 마오의 주장에 매진하던 홍위병 시대 사회 분위기와 달리 

곽말약은 일본 유학파라 마왕퇴 발굴과 조사 당시 일본의 반응에 신경믈 많이 쓴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 자신 젊은 시절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때문에 마왕퇴 발굴 후 그 보존과 연구 보고서 발간 등에서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는데, 

중국이 이처럼 마왕퇴 조사에서 국제적 수준을 의식한다고 할 떄, 

그 "국제적"의 기준은 바로 일본학계였음은 당연하다. 

결국 마왕퇴 발굴 조사는 중국인의 손으로 해야 하며 외국의 도움은 필요 없다, 라고 할 때, 

그 "외국"은 바로 일본을 가리키는 것이고 

"외국이 마왕퇴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라고 할 떄, 

그 "외국"도 바로 일본을 의미하는 것이니, 

마왕퇴가 지금 봐도 경천동지할 문화사적 대사건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이 발굴의 학술적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선진국, 자본주의 블록의 구 제국주의 국가는

일본밖에 없었던 탓이다. 

당시 일본은 신문사에서 마왕퇴 소식만 추려 별책을 정기 발간할 정도로 전국이 들끓었는데, 

미국와 중국의 수교가 핑퐁외교로 전개되었듯이 

일본과 중국의 수교는 마왕퇴를 매개로 전개되었다는 것이 아주 특이하다 할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오는 외교사절단에는 마왕퇴 유물을 근사하게 인쇄한 도록이 증정되었으니, 

당시 마왕퇴 연구는 중국의 국력을 쏟아 부어 그 수준이 극히 높다고 필자가 여러 번 쓴 바, 

그렇게 수준이 높아진 이면에는 바다 건너 일본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고 있으니 

이걸 잘 못했다가는 나라 망신이라는 생각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아는 당시 중국의 식자층들이 

일본을 극히 의식하며 작업했던 까닭이 크다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개되었던 우리 무령왕릉도 비슷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바, 

이 발굴의 사정은 필자는 잘 모르니 그냥 그 정도로만 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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