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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가 채록한 성종의 죽음이다.
(997년) 겨울 10월 무오일에 왕이 병환이 매우 위독해져서 조카 개령군(開寧君) 송(誦)을 불러 왕위를 전하고 내천왕사(內天王寺)에 옮겨갔다. 평장사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하도록 청하니, 왕이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 죄 있는 자를 놓아 주어 부정하게 목숨을 연장하려 하기까지 하겠느냐. 더구나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전을 펼 수 있으랴"
그러고는 허락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당시에는 왕이 병들면 죄수를 사면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를 통해 복을 구하고자 하는 관습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이를 거부한다.
내가 사면령을 내려 죄수를 다 석방해 버리면 내 뒤에 즉위하는 새로운 왕은 무엇으로써 신민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냐는 말이었다.
당시엔 왕이 즉위하면 반드시 사면령이 있었다.
이 사면령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며
더구나 그 시대는 은혜로움만이 있을 것이라는 상징 정치의 하나였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
구질구질하지 않게
멋지게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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