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학자, 특히 조선후기의 "학자"는 우리가 아는 학자가 아니다.
근대의 학자가 갖춘 전문성,
직업으로서의 학자로서의 자각이 없었으며
이 때문에 "연구"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해도 좋다.
조선후기 과거를 보면 그 많은 선비가 몰려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글 하는 사람은 많았다고 해도
읽을 만한 글 별로 없이 문인끼리 뻔한 소리 복붙이 반복된 가장 큰 이유는
학자들이 전문성을 자각하고 이걸로 밥먹고 살겠다는 근대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치열할 리가 없고,
대충 자신의 치장에 족한 수준이다 싶으면 관두고 정치판을 누볐다.
조선후기의 소위 학자라는 사람은 대부분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조선후기 선비들의 독서목록을 보면 편협한 독서편력이 눈에 띄는데,
학자가 아니었으므로 폭넓게 읽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과거 때문에 하는 것 아니라고 누구보다도 목소리 높여 외쳤디만,
학자로서 아마추어인 이들 조선의 "학자"는 정작 폭넓은 독서는 할 필요도 없었다.
에도시대 일본학자들이 18세기 이후 조선을 압도하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은 이거 아니면 밥 먹고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로 밥먹고 산다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학자의 근대성"이다.
공부로 먹고 산다는 이야기를 학자의 타락으로 보는 시각 가지고는 절대로 "근대성"을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문인의 전문성은 먹고 살기 위해 글쓰는 데서 나오며,
연기자의 전문성은 먹고 살기위해 연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윤여정의 이야기를 봐라).
메이지유신과 함께 근대적 학자가 일본에서 재빨리 출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우리가 21세기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학자들이 아마추어 냄새를 풍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학자는 군자라던가, 사회의 목탁이라던가,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던가,
모두 조선후기 이래의 "학자"의 유습인데,
이런 전근대성을 한국학계가 가지고 있는 한은 한국에서는 거장 학자는 안 나온다.
현재 한국학계의 낙후는 다름 아닌 "전근대성"이 그 이유이고,
구체적으로 쓰자면 "직업인으로서의 사명감의 결여", "아마추어리즘"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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