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이 제법 흥행하고 있다. 마침 육지 올라온 김에 현종이 남긴 자취나 보러 다녀올까 해서 여기에 왔다.
국보로 지정된 <천안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 갈기비碣記碑>-사실상 봉선홍경사 터다.
직접 와 보니 절이 있을 자리라기보단 휴게소를 세우면 딱 좋을 자리다.
지금도 큰길 옆에 있을 뿐더러 주변에 산은 눈씻고 찾아도 안 보인다. 실제로 여기 절을 세운 뜻도 그러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은 1021년(현종 12)에 형긍迥兢이란 스님이 왕명을 받아 창건했다. 그런데 왜 굳이 이 자리에 절을 세웠느냐 하면, 현종의 아버지 대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드라마로 잘 알려졌지만(맞나?) 현종의 아버지 안종 왕욱은 태조 왕건과 경순왕의 사촌 누이 신성왕태후 김씨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그는 평소 <법화경>을 읽다가 여행자를 부처님이 보호해주는 마을이 있었다는 내용을 보고 감명받았다. 이에 절을 지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아들 현종이 유지를 받들어 이 절을 세운 것이다.
봉선홍경사가 들어선 천안 성환역 부근은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였지만, 인가가 멀고 길가에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으며 강도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는 1010년(현종 1) 거란의 2차 침입으로 현종이 몽진할 때의 경험이 반영된 듯 싶다.
실제 현종의 피난길은 엄청 고된 행군이었고, 지방 향리한테 "전하는 내가 누군지 아시오?"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시받기까지 했다.
그러니 길을 가다가 이즈음에서 정말로 도둑떼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통행에 불편을 겪었으므로, 개경으로 온 현종이 형긍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한 것이다.
이때 현종은 강민첨姜民瞻·김맹金猛 등에게 명하여 함께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한다. 맞다.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그 강민첨(개인적으로 우리 직계 할아버님이시기도 한)과 김맹이다.
1016년(현종 7)부터 1021년(현종 12)까지 200여 칸 건물을 세우자 현종은 봉선홍경사라는 편액을 내렸으며(사액賜額), 절 서쪽에 따로 객관客館 80칸을 세워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였다고 한다. 국립호텔인 셈.
그 뒤에도 이 절은 왕실과 연계를 맺으며 <고려사>나 <동국이상국집> 같은 역사기록에 더러 나타난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일은 1177년(명종 7) 3월에 있었다.
지금의 대전 탄방동 일대에서 숯을 굽던 망이亡伊 등이 무신정권의 수탈을 이기지 못하고 봉기한 뒤 이 절에 쳐들어온 것이다.
산행병마사 망이가 이끄는 민군은 홍경사를 불태우고 승려 10인을 죽였으며, 주지를 협박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적은 편지를 개경에 전하게 했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 봉선홍경사도 수탈의 주체로 근처 백성들을 많이도 수탈했던가 보다. 그래서였는지 조선 초기에 이 절은 스러지고 말았다.
지금은 1026년(현종 17)에 그 유명한 해동공자 최충崔冲이 짓고 백현례白玄禮가 써서 세운 <봉선홍경사 갈기비>와 석탑 부재 약간만이 남았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한 날씨인데 그 옛날 건물이 빼곡했을 터는 논이 되어 빈 바람만 가득하다. 더러 기와조각이 걷어차이는데 고려시대에 유행한 물고기뼈무늬다.
구양순歐陽詢의 「황보탄비皇甫誕碑」에 가까워 고려시대 해서로는 1급이라는 평가를 받는 갈기비를 가까이 보려고 다가갔는데...
비각을 세운 건 그렇다 쳐도 웬 철망을 빽빽이도 둘러 도대체 비의 전모를 볼 수 없게 만들어놨다.
간신히 틈새를 비집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최충의 글도 읽어보고 조각솜씨도 가늠해보았지만, 이게 뭔 짓인가.
나라의 보배면 나라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을.
지광국사 현묘탑을 건물 안에 세울 거라는 소식을 들은 뒤라 그런가 더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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