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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의 특별하지 않은 박물관 이야기

[전시가 만든 인연] (2) 옷소매 붉은 끝동 덕임과의 만남

by 느린 산책자 2023.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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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 드린 말씀은 이것이었다.

“교수님. 저희가 그 책을 주제로 작은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장하신 3~10권은 저희가 소장하고 있거든요. 가지고 계신 1~2권을 대여해주시면, 10권이 처음으로 한 데 모이는 것이 되어서 꼭 대여를 하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그리고 그 책이 한글로 쓰인 소설 중, 필사자 이름이 정확한 최초의 소설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증거가 1권에 붙어 있어서, 1권은 꼭 전시에서 선보이고 싶습니다.”

그렇다. 이 책 가치는 소설 내용에만 있지 않았다. 곽씨와 장씨 가문 이야기라는 뜻인 ‘곽장양문록’은 3세대에 걸친 가문 이야기여서 그런지, 길기도 길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한 명이 필사하지 않고, 총 6명이 나누어 필사를 했다.

그것은 감사하게도, 1권 표지 안쪽에 붙어있는 종이를 붙여 놓은 덕에 알 수 있는 것이다. 1773년 봄, 정조의 여동생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다른 사람들과 이 소설을 필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필사자들은 본인들이 필사한 곳에 이름을 적어둔 종이를 붙여두어,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궁녀 덕임, 영희, 경희, 복연이다. 그래서 이 책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필사 소설(정확히는 필사자를 정확히 알 수 있는 한글 필사 소설)이라 한다. 

그런데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다. 특히 몇 년 전 유행한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본 분들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바로 소설과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주인공과 친구들 이름이기 때문이다. 궁녀즈라는 애칭으로 일컬은 그녀들이다. 

덕임은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 기록상으로도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덕임 흔적은 다른 사람들이 남긴 것이다. 스스로 남긴 글씨. 이것이 덕임이 남긴 흔적 중 본인의 것이다. 덕임과 함께 이름이 남겨진 궁녀들도 그럴 것이다. 
 

# 의빈글씨라는 종이가 붙은 곽장양문록. 소설과 드라마에서는 '덕임'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었으나, 의빈 사후에 정조가 명을 내려 '의빈'으로 바꾸라 하는 내용이 나온다. 혹시나 하여 종이 뒤편에 덕임이라는 글씨가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작가님 상상인 걸로!

 
이 점에서 나는 소설과 드라마 작가님께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야기에는 참으로 힘이 있구나.’ 싶었다.

덕임 이야기는 정조와의 사랑 이외에도,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면에서 인기가 많았다. 15년간 왕의 성은을 거절(이런 단어를 쓰기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소설과 드라마의 단어를 빌리자면)한 것을 주체성으로 보아야 하는지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 사실과 소설 필사를 했던 궁녀 덕임을 엮어 작가는 의빈 성씨를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얼마 안되는 《일성록》 기록을 엮어, 덕임의 서사를 만들었다. 소설을 필사했다는 사실에서 ‘주체성’을 뽑은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정조의 후궁 중 하나인 의빈 성씨라고 하면 ‘왕이 정말 의빈 성씨를 좋아했나 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길 만한 대목에서, 덕임의 흔적 하나를 엮었더니 모두가 그 이야기에 끌려 들어왔던 걸 보면. 

전시를 한 시점은 안타깝게도 드라마가 종영되고 난 후였다. 그래도 드라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팬들은 전시관까지 찾아와주셨다. 그 글씨 하나를 보겠다고 올라오신 관람객도 생각나고, 궁녀즈(덕임과 친구 궁녀들)의 글씨 주변에서 떠나지 못하던 관람객도 생각난다. 

이해는 이상하게도 계속 의도치 않은 인연이 생겨났다. 전시로 《곽장양문록》을 만났고, 또 다른 사업으로는 관련된 분들을 계속 계속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해는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힘든 해로 기억에 남아있다. 전시를 할 때마다 모든 주제는 다 애착을 갖게 되기 마련이지만, 이 책만큼은 박물관까지 오게 되어 더 애정이 깊다.

그래서인지 이 책으로 해 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덕임이와 궁녀즈 폰트도 만들고 싶었고, 굿즈도 만들고 책도 만들고. 언젠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퇴직 전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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