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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전천후 친일파 박영철朴榮喆의 일본 찬양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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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강민경 선생 글이다. 

1.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1879~1939)만큼이나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다. 그는 전주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갔고, 일본 육사 15기로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강제합병 뒤 1912년 일본 육군 소좌로 전역한 박영철은 강원도지사와 함경북도지사, 삼남은행장, 조선상업은행 부은행장과 은행장, 경성방송국 이사,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조선맥주주식회사 취체역(지금의 이사)을 거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올랐던, 당시로서는 입지전적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딸 배정자와도 같이 살았고, 3.1운동을 비난했으며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기도 했던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하지 않으면 누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일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본을 따랐던 그대는 전천후 친일파렸다.




2. 그런 박영철이 글씨를 잘 썼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얼마 전 일본에서 막 건너왔다는 박영철 글씨를 보았다. 이 시기 지식인들이야 붓이 일상용구였으니 휘호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필체가 좀 들떠 보이지만 붓놀림이 능숙하고 획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아마 그의 성격이 그랬으리라. 그런데 그 내용은 참으로 가관이다.

9월 만주에 천병天兵이 내려오니
온 나라 백성들 도시락 싸들고 맞이하네
옛 것을 바꾸니 지금 새 정사 좋을시고
삼천만 민중이 소생함을 얻었다네
ㅡ 쇼와 임신(1932) 한겨울 다산 박영철

이 시는 박영철의 시문집 《다산시고多山詩稿》에 "축만주신건국"이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만주사변을 일으켜 그 일대를 장악하고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허수아비 국가 만주국을 세웠던 일제의 행동을 찬양하고 있다. 만주에 살던 이들이 저 시처럼 일본군을 정의의 사도마냥 반겼겠는가? 일제가 어땠는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기에 저런 시가 나왔으리라. 저기서 압권은 '천병天兵'이란 단어다.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병와서 일본군과 싸웠던 명나라 군대를 부르던 말을 300여 년 뒤 중국에 쳐들어간 일본군에게 붙인 것이다.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오세창



3. 두인을 보니 '삼연재'라고 했다. 이는 박영철이 갖고 있던 세 개의 옛날 벼루에서 딴 당호인데, 석치 정철조鄭喆祚(1730~1781)가 깎은 벼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썼던 벼루 등등이었다고 한다. 말만 들어도 대단한데 실제로 갖고 있었다니 대단하게 느껴지지만, 이것은 박영철이 지닌 또 다른 면모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과 각별한 사이였다. 그로부터 서화 감식을 배웠고, 서화와 골동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는 위창으로부터 역대 명화를 모은 《근역화휘槿域畵彙》(천지인) 세 책과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거의 다 망라한 《근역서휘槿域書彙》 35책을 인수받아 고이 간직하다가 죽기 전 이를 모두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했다. 이 기증품들이 해방 후에 서울대박물관의 토대가 된다.

 

 

연암집



4. 거기서 그쳤느냐? 박영철은 그와 전혀 공통점이 없는(같은 박씨기는 해도 본관이 다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을 대단히 존경했다고 한다. 이에 연암의 저작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정리해서 1932년 《연암집燕巖集》 6책을 간행한다. 이는 '다산본' 또는 '박영철본'으로 불리며 연암 연구의 필수 텍스트로 꼽힌다. 연암의 한 후손이 그 고마움의 표시로 박영철에게 선사했던 연암 간찰첩(현재 서울대박물관 소장)은 워낙 내용이 재미있어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란 제목으로 최근 번역이 나왔다.

5.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도 아니고, 하여간 참 복잡한 인물이었던 박영철의 글씨를 새삼 다시 바라본다. 바탕 종이가 구겨지긴 했어도 뽀드득 소리 날 것만 같고, 먹이나 인주도 고급이다. 세도 등등했던 박영철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가 써준 글씨를 갖고 일본에 돌아갔던 이름모를 일본인은 이걸 표구도 하지 않고 그냥 두고 있었다. 격랑의 세월을 버티고 지금 이렇게 남은 것이 용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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