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절과 문중이 붙은 100년 전 "내 땅이다" 불대산 결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0. 8.
반응형


[불대산의 결투]


1918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총독부는 임야조사사업을 진행하였더란다.

 

당시 장성군 장성읍 불대산을 두고 백양사연일정씨청안이씨 연합군의 싸움을 담은 1924년 12월 2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이다.


결론은 백양사의 압승이었다.

 


長城의 鄭、李兩家
佛臺山野의 紛爭
地元住民의 陳述

全南 長城郡 長城面 流湯面[里] 佛臺山으로 하여금 白羊寺, 鄭李兩姓家間에 係爭함에 對하여 一般의 非難과 地元住民의 陳情書까지 提出하였던 事實은 既爲報導한 바이거니와 該陳情書의 全文은 左와 如하더라.




陳述書
長城郡 長城面 流湯里 所在 山野(山名佛臺山) 一圓에 對하여는 白羊寺, 鄭、李兩姓家間에 現今 紛爭中인 地인바 本人等은 右의 山野에 對하여 地元住民으로써 慣行上 元來農作의 時 一切草肥를 採用하는 緣故가 有하였기로 該山野에 關한 歴史由來를 左記와 故히 提出함.

佛臺山歷史由來
高麗恭愍王時代에 僧懶翁國師가 本山에 大伽藍下清寺를 建築하여 該山 全部가 寺有道塲에 屬하여 同山内에 寺垈遺地가 無數하고 又한 石佛, 石塔, 濟圖[浮圖] 等 石物이 尙今 宛在함.

一. 下清寺는 李朝 崇儒斥佛의 時代에 僧殘寺廢의 悲境에 陷한바 寺의 一部가 距今十九年前 明治三十九年 丙午年度까지 殘有하여 僧 翠雲이 住居하다가 偶然 火災에 罹하여 全亡하고 但 山野 全部는 白羊寺管理故事에 依하여 純然한 寺山 性質이 明白함.

一. 右山野 全部 天然林 守護의 責任은 禁伐禁火 地元住民이 擔行하고 一年草는 農時 肥料로 하여 寺外 住民間 協調上으로 住民의 採用으로 함.

以上은 佛臺山 名佛字[宇]의 義를 考하여도 元來 寺有의 天然證據가 無疑할 뿐더러 上記 歷史는 古老相傳에 萬口一碑의 實을 掩지 못함.

一. 右山內에 古下清寺 所屬인 來脉庵은 李朝明宗時代에 鄭松江, 李石灘 兩賢이 同山水의 明麗함을 愛하여 該庵의 一時同賞의 跡有한데 其後 僧徒가 兩賢을 追慕하여 該來脉庵을 變稱하여 鄭李庵이라 指名함. (此 鄭李庵은 佛家에 無干함)




右는 鄭李兩姓家는 過般山野 測量의 際에 鄭李庵 變稱을 利用하여 該寺有佛臺山 全部를 假粧的兩家의 共同私有로 신고함.

參考 : 朱夫子께옵서 武夷山에 精舍를 置하시고 崔孤雲先生이 伽仰山[伽倻山]에 入하셨으되 武夷, 伽夷[伽倻]가 兩家의 私有地라 하는 지목은 無함.

右佛臺山의 歷史는 上記와 如함.

本人等 住民一般은 寺와 兩家間 紛爭에서 因하여 農時 肥料採用上 將來의 坊害를 慮하여 右의 歷史 由來를 舉하여 진술함.

참고 : 불대산은 오늘날 불태산이라고 한다. 어째서 불태산이 되었는지 추적해 보았더란다. 보통 모르면 일본놈이 고쳤다고 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더라. 佛臺山을 흔히 속자로 佛坮山으로도 쓰는데, 해방 이후 지도에서 佛台山으로도 표기했더란다.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이 이를 불태산이라고 정리해버린 것이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