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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보지 않고도 본 듯 뻥깐 《주관육익周官六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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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쟁이]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는 책은 고려말에 편찬된 정치와 법제 따위를 정리한 서적으로 알려졌으나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주례(周禮)》와 《통전(通典)》의 체제를 본떠서 고려의 문물제도를 정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책마다 그 저자를 달리 전하고 있어 김구용(金九容), 김경숙(金敬叔), 김지(金祉) 등 여러 명이 언급되고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지에서 고려의 답험손실(踏驗損失), 염법(鹽法), 부세(賦稅), 산장수량(山場水梁) 따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언급되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삼한(三韓), 삼국, 고려 등의 역사와 지방의 연혁, 성씨 유래 따위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었다.

임란 직후 이항복 등은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보지 못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다가 이른바 이종휘, 이덕무, 김정호 등 실학자들의 저술에서는 보고 적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봤을까? 그 인용한 구절을 보면 재인용한 것들이다. 정직하지 못한 자들이다.

나는 훈민정음 해례본보다 이 책을 더 기다린다.

 

*** 台植補 ***

 

세종실록 11년(1429) 3월 20일 첫번째 기사에서 이르기를  

정사를 보았다. 좌대언 허성(許誠)이 啓하기를 "문과에 합격한 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상고하여 아뢰라" 했다. 

하는데 그 번역 주석에서는 주관육익을 "주례(周禮)의 편명(篇名)"이라 했는데, 엥? 주례에 이런 편명은 없다. 

같은 왕 13년(1431) 1월 12일 정축 일곱번째 기사로

이조에서 이르기를 "외관外官의 품질品秩은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의하여 유수관留守官은 종2품, 대도호부大都護府와 목관牧官은 정3품, 도호부都護府는 종3품, 지군사知郡事는 종4품, 판관判官·현령縣令은 종5품, 현감縣監은 종6품으로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 했다. 

이어 같은 해 1월 19일 첫번째 기사에서

임금이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급전제給田制를 다시 정하려고 하는데 다만 수령守令에게는 결단하기 어려운 곳이 있으니, 외관外官이란 간혹 품질品秩이 낮은데도 올려서 제수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 직임대로 한다면 급여할 숫자가 많을 것이므로 산관散官에 의해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조판서 권진權軫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고제古制대로 현 직임에 따라 주어야 할 것입니다"....임금이 그래도 산관散官의 예를 따르려 하니, 허조가 아뢰기를 "다시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상고하여 이를 참작해 정하도록 하옵소서" 하매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세종 25년(1443) 11월 2일 첫번째 기사로는 세종이 호조에 하교한 말을 인용하기를 

"우리나라 손실損實의 법이 김지金祉가 지은 주관육익周官六翼에 보이는데, 대개 고려高麗 때부터 이미 행한 것이었다. 이것이 비록 아름다운 법이나, 수세(收稅)의 가볍고 무거움이 관리의 한때의 보는 것에서 나왔으므로, 경중(輕重)을 크게 잃고 백성의 폐해도 또한 많았다. 또 하나하나 쫓아서 손실(損實)을 정하는 것은 옛부터 경전(經傳)에 없었다. 대개 공법은 중국에서 삼대(三代) 때부터 지금까지 행하여 바꾸지 않았고, 본국에서도 이미 하삼도(下三道)에 시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의 절목은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지금 마땅히 자세히 헤아려서 다시 정한다면 거의 백성에게 편할 것이다. 그 첫째는, 종전에는 3등 전척(田尺)의 장단(長短)과 3등 전방면(田方面)이 그 차(差)가 고르기는 하나, 실지 면적의 차는 고르지 못하였으니, 지금 각 등급의 한전(旱田)과 수전(水田)을 한 모양으로 고쳐 측량하여, 조세(租稅)를 등급을 보아 가감(加減)하여 고제(古制)에 따르게 하라. 이미 고제를 따른 것이라면, 밭을 계산하는 자(尺)와 결·복·속·파를 옛날 제도에 의하지 않고, 종전 그대로 하는 것은 편하지 못하니 마땅히 주척(周尺)을 써서 고쳐 측량하여야 할 것이나, 1, 2년 내에는 고쳐 측량하기가 쉽지 않으니 우선 구전안(舊田案)을 가지고 먼저 5등의 전품으로 나누고, 결·복·속·파를 고쳐 경(頃)·묘(畝)·보(步)의 법으로 만들어 5등의 조(租)를 거두면, 거의 고제(古制)와 시무(時務)가 아울러 행하여져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 둘째는, 지난날에 도(道)를 3등으로 나누고 고을[官]을 3등으로 나누며, 밭을 3등으로 나누었는데, 실은 정밀하지가 못하였다. 대개 수전(水田)은 하삼도에 비옥한 것이 많고 경기·황해도가 다음이고, 강원·함길·평안도가 그 다음이며, 한전(旱田)은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8도가 거의 한결같고, 또 한전의 소출이 수전에 미치지 못하나, 이제 마땅히 수전과 한전을 각각 5등을 나누어 한전 제 1등은 수전 제 2등에 준하고, 한전 제5등은 수전 제 5등의 아래에 있게 하여 각도 각 고을을 등급 지어 나누지 말고, 팔도의 전지를 합하여 다만 전품(田品)을 보아서 등급을 나눌 것이다. 셋째 주례周禮에는 사가(司家)의 관원이 들에 순행하여 농사 형편을 보아서 해의 상등·하등에 따라 거두는 법을 내었으니, 공법은 그 해의 풍흉(豐凶)을 보아서 그 세(稅)를 올리고 내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상·중·하 3등을 각각 3등으로 나누어 합해 9등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단지 3등으로만 나누면 상하 사이의 조세(租稅)의 경중이 너무 두드러지게 다를 것이니, 만일 9등으로 나누면 비록 맞지 않더라도 심히 서로 멀지는 않을 것이다. 매년 9월에 각 고을의 수령이 화곡의 결실 상황을 살피어 해의 등급을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다시 검토(檢討)를 가하여 수전과 한전을 각각 따로 등급을 나누어 계문(啓聞)하되, 만일 각 고을의 화곡이 크게 판이하면 각 고을의 등급을 나누어 계문(啓聞)하라. 의정부와 육조에 내려 시행하게 하겠으니, 너희 호조는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했으니 이에서 그 저자로 김지金祉라는 이가 인용하며

세종실록지리지  구도 개성 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에서

김지金沚가 지은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르기를

" 임인 3월에 이름을 고쳤고, 우봉군(牛峯郡)·덕수(德水)·강음현(江陰縣)·정주(貞州)·장단(長湍)·임강(臨江)·토산(兎山)·임진(臨津)·송림(松林)·마전(麻田)·적성(積城)·파평현(坡平縣)을 관할하였다"고 했다.

는 주석이 인용되므로, 지리지 성격도 있는 것으로 본다.  

이 주관육익은 실록을 검색해 보건대 유독 세종 시대에만 보이며, 나아가 세종 자신이 이 책을 자주 본 모양이라, 무엇인가 결단할 적에 이 책을 전거로 삼는 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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