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丹心歌(단심가) -
1. 용인과 포은 정몽주, 그리고 충렬서원
대한민국 사람 중에서 '단심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단심가'라는 제목은 몰라도, "이 몸이 죽고 죽어~ "로 시작하는 저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시조를 지은 사람은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이자,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대학자로서 지금까지도 존경받고 추앙받고 있는 포은 정몽주이다.
( "정몽주"라는 이름 석자가 갖는 무게와 의미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포은 정몽주를 배향한 서원은 전국에 18개소에 달하였다. 이중에서 영천 임고서원, 개성 숭양서원, 용인 충렬서원, 포항 오천서원이 정몽주를 배향한 서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 18개 서원 가운데 숭양서원만이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에 포함되었다.
(원래는 충렬서원이 존치될 목록에 들어가 있었는데, 숭양서원이 존치되고 충렬서원이 철폐되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각도의 이미 사액(賜額)한 서원(書院)으로서 남겨 두어야 할 곳 47개 이외에는 모두 제향을 철폐하고 편액(扁額)을 철거하도록 이미 별단으로 계하 받은 바 있습니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를 제향하는 곳은 바로 개성부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및 용인현(龍仁縣)의 충렬서원(忠烈書院)인데, 용인의 충렬서원이 그대로 남겨 둘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숭양서원으로 바꾸어 그대로 남겨 둘 곳에 집어넣고 충렬서원은 제향을 철폐하고 편액을 철거하도록 대원군의 분부하신 뜻을 받들어 별단으로 고쳐 부표(付標)하여 들입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8년 신미(1871) 6월 24일(계미)]
현재 용인에는 정몽주 묘소가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고, 정몽주를 배향한 충렬서원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몽주를 알지만, 정몽주 묘소가 용인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매년 '포은문화제'라는 축제를 열고 있으나, 용인이 포은 정몽주와 관련있는 지역이라고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그를 배향한 충렬서원이 용인에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2. 용인의 서원들 : 충렬서원, 심곡서원, 한천서원
용인에는 충렬서원, 심곡서원, 한천서원 등 3개의 서원이 있었는데, 충렬서원과 도암 이재를 배향한 한천서원(이동읍 천리, 이재 선생의 묘도 현재 천리에 남아있다.)은 훼철되었고, 정암 조광조를 배향한 심곡서원은 훼철령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이 중 충렬서원은 1924년 복원되었으나, 한천서원은 복원되지 못했다.
현재 용인에 충렬서원과 심곡서원 2곳이 남아 있지만, 원래 이 둘은 하나였다.
1576년 정몽주와 조광조를 모시기 위해 두 묘소의 중간 지점인 죽전에 '죽전서원'(죽전서원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이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1605년 각각 충렬서원과 심곡서원으로 나누어 정몽주와 조광조를 배향했다.
이 때 충렬서원은 경기도관찰사 이정구, 용인현감 정종선, 진사 이시윤 등이 주도하여 재건했다. 이정구는 이석형의 현손으로, 이석형은 정몽주의 증손녀 사위이다. 이러한 집안 배경으로 보아 이정구가 충렬서원 재건을 주도했던 것은 경기도관찰사로서의 임무이자 개인적인 사명감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렬서원 재건은 1605년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하였는데, 정몽주 묘소 아래에 사당 3칸, 동재와 서재 각 2칸, 문루 3칸 규모로 완성하고 문루 위에 강당을 지었다고 한다.
1608년 신위를 봉안하고, 편액을 요청하여 1609년 '충렬서원'으로 사액받았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보수와 중건의 과정을 거쳤는데, 1717년(1706년으로 알려졌으나, 중건기를 작성한 정제두의 나이를 가늠할 때, 1717년으로 보인다.) 옛터에서 조금 서쪽으로 사우를 이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11년부터 유림들에 의해 복원이 논의되었고, 1924년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56년 강당을 복원하고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3. 충렬서원의 원래 위치는 어디일까?
죽전서원이었던 시절을 제외하면, 1605년 충렬서원으로 건립하고, 1717년 한 차례 이건한 위치가 현재 위치이며, 1924년 복원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충렬서원의 연혁이다.
이를 통해 충렬서원이 최소 한 차례 이건, 복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차) 정몽주 묘소 아래 -> (2차) 옛터의 서쪽 (현재 위치)
하지만, '정몽주 묘소 아래'로 알려진 충렬서원의 (1차) 위치는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막연히 현재 충렬서원의 위치가 정몽주 묘소에서 서쪽에 해당하므로, 이건했다는 기록과 내용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예상외로 충렬서원에 대한 연구가 별로 많지 않다는 점에서 놀랐고, 충렬서원의 원위치에 대해서도 연구된 글이 없다는 것에서도 놀랐다.)
얼마 전, 서원 관계자로부터 정몽주 묘소 부근에 '텃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서원터'였기 때문에 '텃골'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원래 정몽주 묘소 아래 있던 서원이 이곳으로 한 차례 옮겨졌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717년 이건 기록과 관련해서 유의미한 내용이라, 얘기를 듣고 바로 텃골이라고 불리는 곳을 찾았다.
주변에 산재한 기와편들로 볼 때, 건물이 들어섰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관련 기록과 자료를 좀 더 찾아보고, 현장 지형과 유물 산포 현황 등을 좀 더 살펴야겠지만,
어쩌면 충렬서원은 최소 두 차례 옮겨졌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물론 좀 더 자료를 정리하고 조사해서 학술적 검증을 거쳐야 할 것이다.
과연 충렬서원의 원래 위치는 어디일까? 충렬서원은 정확히 언제 지금의 위치로 이건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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