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규의 《연경일기燕京日記》를 방금 독파하다.
이 일기는 병자호란 이후, 그리고 중원에서는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된 직후인 1645년 인평대군을 수괴로 하는 사절단의 넘버2인 부사로 임명되어 연경을 다녀온 정세규라는 사람의 연행록이다.
이후 연행록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이는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중원이 아직 혼란이 정비되지 않아 중국으로 오가는 행차가 자유분방한 편인 바, 이후에는 이런 모습이 없다.
이후 연행록을 보면 사행길은 사사건건 중국 당국에서 간섭받는다.
나아가 전후의 혼란이 여실하다.
더불어 심양의 황궁 조성 직후 모습이 적나라하다.
이에는 담배 얘기가 있고, 생선회를 먹는 장면이 곳곳에 출현한다.
(2014. 2. 22)
이 정세규(1583~1661) 연행일기는 조영임 옮김으로 도서출판 학민사에서 2014년 02월 15일에 출간됐다.(2만4천원) 정세규는 1645년, 63세에 사은겸진하부사로 차출되어, 3월 17일 서울을 출발해 6월 16일 귀환보고를 하게 되거니와 이 기간 117일간 보고 들은 일을 날짜에 따라 정리하는 한편 중요한 사항 10가지는 따로 정리했다.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인 셈이다.
정세규鄭世䂓를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거해 약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지의금부사,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군칙君則, 호는 동리東里.
증조부는 정진鄭振이고, 조부는 우의정을 역임한 정언신鄭彦信, 아버지는 생원 정율鄭慄이다. 어머니는 원호준元虎俊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문음門蔭으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화순현령·안산군수를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에 조신朝臣들 추천을 받아 4품 산질散秩에서 충청도관찰사로 특진되고, 그해 겨울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자 근왕병을 이끌고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격하다가 용인·험천險川에서 적의 기습으로 대패했지만 충성스럽다 해서 사면받았으며 전라감사·개성유수를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다.
사헌부가 문음으로 특별한 공적없이 육경六卿이 될 수 없다고 반대하기도 했다.
이후 형조판서·전주부윤·대사헌·호조판서·함경감사·지의금부사·우참찬을 지냈으며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니 과거에 급제하기 못하고 이렇게 출세한 일은 드물었다.
1654년(효종 5) 강화유수가 되어 승천昇天·연미燕尾·갑곶甲串·광성廣城 등지에 진鎭을 설치했다.
그의 출세 배경에는 김육金堉이 있었다 한다. 시호는 경헌景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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