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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조금은 웃기는 2023학년도 수능 암사동유적 시험 문제

by taeshik.kim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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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지 4교시 한국사영역이라 그 첫번째 문항으로 서울 암사동 유적 중에서도 신석기시대 부문만 꼴랑 집어내고서는 그 대표 유물이라는 빗살무늬토기 하나 그림으로 제시하면서 그 시대상에 부합하는 답안을 구하라고 한다.

아마도 고고학 전공자가 붙잡혀 들어가 감옥생활하며 마지 못해 출제한 듯하며, 참말로 쉽게 낸다고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니, 저 중에 고르라는 답안 후보지들이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답이야 물론 간석기, 다시 말해 돌을 가공해서 만든 도구를 사용했다는 1번이 된다.

답안이야 그렇다 치고 저것도 얼마나 웃기냐 하면, 석기를 흔히 2차 가공을 했느냐 아니면 그냥 때려서 갈라져 나오는 대로 그대로 사용했느냐에 따라 간석기와 뗀석기로 나누지만, 갈아서 만든 석기? 뚝 떼어서 만드는 석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저들 석기가 각각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만 사용한 줄 안다는 사실이다.

뗀석기건 간석기건 지금도 다 사용한다!!! 갈아만드는 석기야 일상에서 부지기 숫자에 달하며, 보석 역시 石의 일종이라 그것도 간석기 일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뗀석기? 예컨대 지금도 문화재 보수현장, 특히 성곽이나 건축물 같은 복원현장에서는 당당한 주류로 자리잡아 초석이라든가 석축 쌓기에 무수히 사용 중이다.

백동화야 저 신석기시대엔 금속기가 없으니 개돼지더러 너 사람 말 할 줄 아냐는 질문과 맥락이 같고, 철제무기가 보급되었다? 이건 앞으로 올라갈 공산은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 중남부를 기준으로 할 적에 대략 기원전 300년 어간을 넘기는 힘든 듯하며

 

1968년 암사동 발굴...이렇게 발굴한 걸로 지금의 암사동 유적을 만들었다고?



내가 폭소를 자아내는 데는 비파형동검이랑 석굴암 본존불이다.

비파형동검은 그 옛날 구닥다리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 고고학도들이 명명한 것으로 그 몸체 혹은 전체 모양이 동양 악기 비파를 닮았다 해서 그리 이름한 것으로 미안하나, 비파를 몇 사람이나 알겠는가?

요새 추세를 반영한다면 바이올린 모양 칼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이해가 쉽다. 이 동검은 청동기시대에 주로 만주 쪽에서 집중하며, 한반도에도 더러 출토 사례를 보인다.

내가 좀 웃은 대목은 석굴암이면 석굴암이지 석굴암 본존불은 무슨 개뼉다귀인가? 그렇다면 석굴암 본존불과 그 부대 시설 혹은 미술품은 시대를 달리해서 만들었다는 추론 혹은 증거가 있는가다. 없다.

대략 동시기에 우리가 지금 아는 그 석굴암 시설이 김대성 시대에 만들어졌다. 함에도 왜 굳이 석굴암 본존불을 떼어내서 저리 물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좀 아는 체 한다는 흔적이 배어나온다.

이 암사동 유적은 흔히 신석기시대 표지 유적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복합 유적이라, 그짝에서 구석기 흔적은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지만, 신석기시대 이래 죽죽 줄곧 사람이 산 데라, 실제 발굴 흔적을 봐도 그런 흔적이 농후하게 드러난다.

다만 그것이 처음 알려지던 시기 저 유적이 하도 귀해서 특별 대접을 받았고 무엇보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가 손을 대고 이후 그것을 포함한 대학연합발굴단이라는 조직이 달라들어 발굴을 벌였으며, 다시 이후에는 국립박물관에 달라들어 드 특별대접을 받은 곳이다.

간단히 말해 저에 관련하는 발굴단이 지금의 이른바 한국고고학 주류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더 특별대접을 받았다는 뜻이다.

저 유적이 유명하다 하지만,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그리된 것이며, 유감스럽게도 저렇게 무수하게 파제껴 놓고 제대로 된 발굴보고서가 수십년째 없었다.

그러다가 보고서 내라 닥달하니 그제서야 마지못해 몇권 냈으며, 그런 마지못해 등떠밀려 보고서 낸 기관 선두주자가 놀랍게도 국립박물관이었다.

이 국박 놈들 파제낄 땐 언제고 매앙 보고서는 시궁창에 쳐박아 두는 습성이 있었으니, 발굴보고서도 안 낸 자들이 그 발굴 경험자라 해서 이곳저곳 불려나와 암사동 유적이 어떤 데니 하며 떠드는 꼴을 실은 구토가 났다.

암사동 유적? 이젠 학설사적인 의미밖에 없다. 여전히 저 유적이 표지유적이나 되는양 떠들지만, 저 시대를 증언하는 신석기시대 유적은 전국에 산포한다. 그만큼 온 국토를 파제꼈다.

이제는 암사동 유적 또한 상대화해야 한다. 언제까지 처음 혹은 초기에 알려진 유적이라 해서, 거기에 서울대 혹은 국립박물관이 간여됐다 해서 특별대접을 해야 하는가?

그건 그렇고 저 암사동 유적을 고리로 삼은 저 수능 시험문제는 암사동 유적이 알려진 이래 한국시민사회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 사례가 하나가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기억이며, 그 기억은 실은 말살을 전제로 한 것이라, 우리가 말하는 역사는 곧 우리가 선택한 기억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들에 대한 말살 억제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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