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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사설학원 열어 연명하는 조선시대 유배 생활

by taeshik.kim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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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黃梓(1689)~?) 1734년 진주사행陳奏使行이라는 대청 사신단에서 서장관 자격으로 북경을 간다. 이때 정사正使가 서명균徐命均, 부사副使가 박문수朴文秀였다.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은 이 사행길에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청淸 옹정제雍正帝 12년, 조선 영조 10년 갑인년이라 해서 이리 이름하고 그의 문집 필의재유고畢依齋遺稿에 수록됐다. 

7월 2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잘 다녀오겠다고 영조를 배알하고 출발한 삼사三使는 이후에는 각자 도생이라 만났다가 헤어지고 각자 개인일도 보고 하는 요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행태를 보이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사행길 일반 패턴이었다. 

삼사가 붙어다니면 쌈박질밖에 더 하겠는가? 

암튼 서장관 역시 넘버3이기는 했지만, 고위공무원단이라 전용 차가 배정되었으니, 그 권세는 하늘을 찔러 가는 데마다 주지육림으로 대접받고, 접대가 맘에 안 들면 직권으로 그 접대를 맡은 아전들은 곤장을 쳤으니 이런 일은 결국 해당 지역 지방관을 징벌하는 상징도 있었다.  

그렇게 탱자탱자 하며 황자는 그달 10일 계미, 아침엔 큰 비가 오다가 오후에는 그쳐 하늘이 잔뜩 흐린 가운데 정오가 지나서 중화中和에 도착하고는 곧바로 그곳에서 유배생활 중인 신처수申處洙를 방문한다. 

해당 날짜 기술은 아래와 같다. 

 

중화권. 저기서 신치수는 유배생활하는 중이었다.

 

곧바로 사간司諫 여인汝仁 신처수申處洙의 유배지로 갔다. 이곳을 생양역生陽驛이라 하는데 관아에서의 거리는 서로 마주보이는 정도였다.

들판 가운데 있는 촌락은 쓸쓸한데다 거처하는 방도 누추하고 으슥했다. 자리 오른쪽에는 책 몇 질이 놓였고 창문 바깥으로 학도學徒 몇 명이 있었다. 이는 근심을 해소하고 번민을 떨쳐버리기 위한 것이다.

문 앞에 농민들이 일할 때 쓰는 농막 같은 누각이 있기에 물어보니 “날이 너무 더우면 위에 올라가서 납량納凉을 한다.”고 하였다.

즉시 서로 손을 잡고 올라가 마주앉아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저물어 관아로 돌아와 선화당宣化堂에 묵었다.

 

조선시대 유배생활하면 우리는 보통 유배생활을 한 당사자의 입을 통해 그 생활 일단들을 엿보고는 했지마는, 이 경우는 그렇게 유배생활을 하는 지인을 찾아간 사람이 그 생활 일단을 남긴 장면이라는 점에서 사뭇 의미가 다르다. 

유배지는 역원 가까운 지점에 있었다. 그러니 오가는 고관대작들이 틈나는대로 들렸을 것이다. 아 물론 친하거나 같은 당파여야 한다는 제한은 있지만 말이다. 

갈 때 그냥 갔겠는가? 일상에 요긴한 물품 바리바리 싸서 갔을 것이다. 이 대목이 빠졌다. 왜? 괜한 오해 살까봐 일부러 발설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 역원 가까운 지점에 그 역원을 관리하는 사람들 터전으로 생각되는 작은 마을이 있고 그곳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하숙집에서 신처수는 고액과외 선생을 하고 있었다. 뭐 그랬겠지? 서울에서 행시사시 패스한 선생이 왔노라고 찌라시 돌려서 학생들을 모집했을 테고, 그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했을 것이다. 뭐 말이 고액이지 고액하고 싶어도 고액을 낼 사람이 있어야지? 그냥 쌀께나 얻어먹고 살았다고 봐야 한다. 

방 구석에 책은 많지 않았지만 몇 질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교재 몇 권이랑, 무료함을 달랠 예컨대 자치통감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는 한데, 문제는 인쇄본은 열라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겠으니, 아마 필사본 아니었을까도 한다. 

유배생활이 뭐 위리안치라 해서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는 가시나무 덤불 우거진 담장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는 상념이 접기 쉬우나, 웃기는 소리. 

그리고 유배는 자비유학이었다. 그래서 지가 벌어먹고 살아야 했다. 서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선생질밖에 없었다.  

저 신처수는 한국고전번역원 역본 주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한다.

1690~1742.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여인汝仁이다. 1721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는데 1727년 사간이 되었다가 상소와 관련하여 파면되었다. 1729년 복귀하여 장령掌令을 지냈는데 삼전도 비문을 쓴 오준에 관한 간언을 했다가 갑산에 위리안치되었다. 1732년 가까운 곳으로 옮겨지고 1735년 직첩을 돌려받았다. 다시 사간으로 있다가 1741년 왕명을 어겼다하여 진도 군수로 좌천되고 이듬해 복귀하였으나 사망하였다.

이걸로 보아 꼰대 기질 다분했던 듯하다. 좀 물러터지게 살지 뭐 영화보겠다고 빠락빠락 대들다가 걸핏하면 쫓겨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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