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을 하고 나면 식민지가 되느냐 제국주의로 가느냐 선택지는 둘 뿐이다.
전자로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쥐어짜서 계획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서구화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발전한 나라가 메이지시대 일본이다.
필자는 에도시대 일본이 질적으로 조선사회와 큰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상업자본이 발전하고, 일찍부터 난학으로 상징되는 일본 밖의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차이지만,
본질적으로 두 나라 차이는 개항이후 발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단 개항하고 나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쥐어짜서 필요한 곳에 돈을 써야 한다.
쉽게 말해서 학교를 세운다든가, 군대를 키운다든가.
그런데 조선은 개항을 전후하여 그 전에도 하지 않던 궁궐 신축을 두 번 했다.
첫번째는 경복궁,
두번째는 덕수궁.
이렇게 국력을 소모하며 지어 놓고는 정작 제대로 여기 살지도 않았다.
경복궁, 덕수궁을 지으면서 이미 조선의 식민지화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가지고 있는 유용한 자원을 쥐어 짜서 써야 할 곳에 써도 모자란 판에 그 돈을 궁궐 짓는 데 써버리니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다.
구한말 여러 모로 아쉬운 부분이 많은 시기인데, 특히 고종을 위시한 집권층 무능은 망국의 첫 번째 이유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 Editor's Note ***
그러고 보면 개항한 나라가 맨먼저 해야 하는 일이 당장을 위해 행정집행력 있는 사람들이 구미권을 시찰하고 미래를 위해 동량들을 선발해 국비 유학생을 파견하는 일인데
이 점에서 조선왕조 혹은 대한제국은 일본에만 기댄 데다 지지리도 운빨까지 안 따라서 패착하고 말았으니
시찰단이라 해 봐야 1881년 1월 일본으로 간 이른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전부라 그나마 시찰단도 주변 눈을 피해 동래암행어사소집 명령에 따라 비밀리에 동래에 집합케 해서 일본으로 밀항하듯 갔으니 예서 무슨 성과라 할 만 한 게 있겠는가?
12개 반으로 편제되었다는 당시 유람단은 어중이떠중이 합쳐 62명이었다 하는데 이를 어찌 메이지정부가 추진한 구미 시찰단에 견주겠는가?
이것이 전부였다.
국비 유학생 선발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추진한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이 전부이다시피 했으니 그나마 이듬해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터지면서 정부 지원조차 끊겨 조기귀국하는 촌극을 빚고 말았다.
조선정부 혹은 대한제국 정부는 무능했으며 세계와 미래를 볼 줄도 몰랐으니 그나마 없는 돈은 모조리 엉뚱한 데 꼬나박고 말았으니 이러고도 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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