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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조선총독부 국박 고문서의 추억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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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혹은 그 이듬해 무렵이 아니었나 한다. 

교토대학 인문학연구소 어떤 교수가 날 찾아왔다. 

나를 직접 찾은 것은 아니로대, 잘 아는 국내 어느 지인을 통해 무슨 자료를 보려 했다가 내가 걸린 모양이었다. 

다카기 쇼지. (다카기 히로시인데 나는 맨날 쇼지 라 불렀다.)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 시대 고문서를 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그 고문서 상당수가 공개되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때라, 박물관에서도 노란봉투에 담가서 보관만 하던 시절이다.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다카기 교수는 교토대 전근 이전 삿포로대학에 재직하면서 도쿄박물관 고문서를 정리했다. 

그 조사성과는 공개되었다. 

그러면서 다카기가 말하기를 "이빨이 빠졌다. 총독부 문건을 같이 봐야 한다"고 하면서 나한테 그 문서 열람 주선을 부탁했다. 

그땐 내가 힘이 좀 있던 시절이라, 그리고 만나보니 다카기가 쓸.만한 사람이고, 더구나 그가 낸 책을 본 적이 있었던 터라, 믿고서 주선을 했다. 

박물관에 부탁했다. 이런저런 일로 고문서를 보고싶댄다.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이 민병훈 선생이다. 
 

촬영시점을 보니 2001년이다. 가운데가 다카기, 맨오른쪽이 박환무다.

 
당시 박물관은 지금의 경복궁 안 고궁박물관에 있던 시절이다. 

약속한 시간에 다카기를 대동하고 갔다. 

민 선생이 총독부시대 서류 뭉치 한 박스를 내놓았다. 

보니 고적도보에 무수하게 보이는 이름들이 제출한 복명서 따위였다. 

이후 국박에서도 이 문서 정리하겠다고 해서 성균관대 출신 모 박사를 채용하고 했다고 기억한다. 

정리하다 말고 일본으로 튀었다. 

이후 국박 내부에서도 고문서에 주목한 연구직이 제법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영찬과 이병호 등등이 그런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이 이후 이 조사성과를 토대로 논문도 발표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그냥 각중에 생각나서 긁적거려 둔다. (2017. 1. 16) 

그 직후 내가 일본을 가서 다카기한테 한 턱 얻어먹었는데 그 자리서였는지 혹은 그 직후였는지 모르겠지만 목요클럽을 소개하면서 그 잡지 한 뭉치를 주더라.

아마 4호까지 나온 시절이 아니었던가 한다. (同日)

 
***
 
당시 일본 쪽에서 다카기라든지 목요클럽이라든지 하는 친구들 제국주의시대 문화재 연구가 활발했으니, 이런 움직임이 국내에도 일정한 타격을 주었다.

특히 목요클럽 영향은 절대적이었고

또 그 무렵 다카기는 물론이고 이성시 또한 저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할 때라 이케우치 히로시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였다. 

저에서 적지 않은 국내 연구자가 감발해서 저쪽으로 뛰어들었다. 

문제는 그 수준. 

내가 볼 때는 자료 해제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계속 말하듯이 저 시대 문화재사 고고학사 연구는 정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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