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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1915년 능산리 조사의 의문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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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한여름 7월에 도쿄제국대학 출장 명령을 받고 조선고적을 답사 중이던 흑판승미黑板承美 칠판씨는 부여 능산리에서 중하총과 서하총 두 고분을 발굴했다. 

서하총 발굴이 진행될 무렵, 세키노는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부여 고적조사를 벌이던 중 현장에 도착한다. 

세키노는 현장에서 서하총 발굴 현장을 봤다.  

그러고는 그 자신도 같은 능산리 고분군 6기 중 하나를 골라서 팠다. 

이런 사실은 두 사람이 남긴 글에서 각각 확인된다. 

 

흑판승미 복명서

 

문제는 이들이 이때 발굴한 능산리 일대 백제 고분이 이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흑판씨 복명서를 보면, 중하총과 서하총 발굴을 끝내고는 세키노 일행과 함께 같은 능산리에서 무덤 하나를 더 팠다고 했다. 

흑판씨는 이 무덤이 깬돌로 벽을 쌓은 구조라는 점에 착목해 이를 할석총割石塚이라 명명하고는 그 실측도까지 이듬해 도쿄제국대학에 제출한 복명서에 첨부했다. 

세키노는 이때 발굴성과를 그해 10월인가 발간된 고고학잡지 6-3호에 '백제의 유적'이라는 글을 투고하면서 공개했다. 

한데 세키노 이 글을 보면, 마침 그가 현장에 도착했을 적에 흑판씨는 서하총을 발굴 중이었다고 하면서, 그 자신은 다른 무덤 하나를 골라서 팠다고 하거니와,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무덤 3기를 더 팠다고 했다. 

그렇다면 1915년 발굴한 능산리 일대 무덤은 지금의 능산리 고분군 6기 중 3기와 다른 무덤 3기를 합친 총 6기다. 

다른 무덤 3기 중에 저 할석총이 들어간다. 이 할석총에 대해 세키노는 그 자신이 판 것처럼 기술했지만 흑판씨 증언에 의하면 이는 공동 발굴이다. 

이때 조사 성과 중에 체마리대총이라는 무덤이 있다. 이것 역시 간략히 보고가 되었다. 이 세 무덤이 미스터리다. 

선행 연구성과를 훑어보니, 미안하지만, 원전들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선학들이 쓴 논문을 간접인용한데 지나지 않는다. 

제법 많은 혼동이 빚어지는 이유다. 

이참에 그것을 바로잡겠다고 내가 나섰는데 잘될랑가 모르겠다. (2017. 1. 16)

 

***

 

저 글을 쓰던 당시 나는 부여군 의뢰로 능산리 100년사를 정리하는 단행본을 쓰는 중이었고 그해에 선보였다. 

저때 품은 의문은 시간이 흘러 그새 여러 모로 의문이 풀리기도 했으니 능산리 동고분군과 서고분군이 각각 확인되는 일로 발전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별짓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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