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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2) 대통령 전용차 부실 제작 책임을 진 장영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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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시황제 병마용갱 출토 온량거轀輬車. 아마 복원품일 것이다.

 
2. 대통령 전용차 부실 제작 책임을 진 장영실 

시험 삼아 이에서 ‘장영실’이라는 키워드를 집어넣어 본다. 우리에게 상식으로 각인한 장영실은 세종시대에 측우기를 비롯한 각종 과학기구를 만든 장인이라 해서 그에서 본뜬 과학정신을 기린다며 만든 과학상 이름도 ‘장영실상’이 있을 정도라 난삽하게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결과는 전연 뜻밖이다.

그 방대한 실록에도 번역본 기준으로 실록에서 걸리는 ‘장영실’은 서른 번밖에 되지 않으며, 더구나 그의 사후에 언급된 이름 빼고 생전에 등장하는 ‘장영실’은 횟수가 14번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당황스러운 점은 그 14번 중에서도 절반에 육박하는 무려 6건이 뇌물을 받거나 물건을 잘못 만들어 처벌 받은 일에 관한 것이니 도대체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각종 인명사전을 보면 장영실은 태어난 해도 모르고 죽은 해도 없다. 홀연히 역사에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조선 초기 때 인물인데 생몰년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행적이 미미하거나 그럴 만한 ‘금수저’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대과가 없다.  

그의 행적을 훑을 때 퇴장하는 계기가 된 것이 분명한 사건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세종실록 세종 재위 24년, 1442년 3월 16일 대목에는 “대호군(大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안여(安輿)를 감조(監造)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거 부실사고 나서 장영실은 영원히 사라졌다.

 
호군(護軍)이란 글자 그대로는 호위하는 군사이니 예서 그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임금이다. 그 앞에 대(大)자가 붙었으니 임금 호위병 중에서도 대장급에 해당한다.

애초에는 장군들에게 주는 호칭이었다가 나중에는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단순한 명예직 비슷하게 된다. 품계로 보면 종3품이라 대단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 이 무렵에 장영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위 관료로서 임금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안여(安輿)란 편안한 수레라는 뜻이니 이는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감조(監造)란 총감독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저 구절은 장영실이 임금이 타시는 수레를 만드는 일을 감독했지만, 그렇게 해서 만든 수레가 부서져서 처벌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사법 당국의 수사를 받게 되는 장영실은 어찌 되었을까?  
 

임금이 타는 수레는 불량이 없어야 한다. 파라오라고 예외이겠는가?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이에서 약 한 달 남짓 지난 뒤인 4월 25일에 보이니 이날에 또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사헌부에서 다음과 같이 상소(上疏)했다. 

“신하의 죄는 불경(不敬)한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불경(不敬)한 데 관계되면 비록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는 법이온데, 하물며 그 큰 것이겠습니까.

박강(朴薑)·이순로(李順老)·이하(李夏) 등은 서로 잇달아 명령을 받아 이천(伊川)의 행궁(行宮)을 감독 제조하였는데, 기와를 덮고 구조(構造)를 장식한 것이 대부분 견고하지 않았을 뿐더러, 부서진 집의 기와를 즉시 걷고서 고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못을 쳐서 긴 첨아(簷牙)를 꺾어 부러지게 하고는 진흙을 사용하여 부접(附接)하였으며, 대궐 안의 안공(鞍工)으로 하여금 기와를 처마에 잇게 하다가 뜻하지 않은 데에 떨어졌으나, 다행히 사고는 없었습니다만 혹여라도 보좌(寶座)에 가까이 부딪쳤더라면, 박강 등의 한 몸뚱이는 만 번 죽더라도 어찌 보상(報償)하겠습니까. 이것을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한심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는 바입니다.

대저 부호(富豪)의 자식도 마루 가에 앉지 않는데, 하물며 천승(千乘)의 임금이겠습니까. 다행히 사고가 없었다고 해서 특별히 가벼운 죄에 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이 불경(不敬)에 관계되면 보통의 사면(赦免)에는 용서받을 수 없으며, 그 임금이 타는 배를 잘못하여 견고하게 하지 않은 것도 오히려 대불경(大不敬)의 조목에 관계되는데, 박강 등은 심사(心思)와 이목(耳目)의 힘을 다하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훈벌(勳閥)의 후손이라 해서 전일의 죄를 함께 헤아려 그 죄를 바로잡지 않겠습니까.

이순로와 이하는 다만 직첩(職牒)만 회수하고, 박강은 다만 그 관직만 해임시키니, 죄는 큰데도 벌은 경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세상 사람의 마음에 굽어 따라서, 박강은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하고 이순로와 이하는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어 불경(不敬)한 사람을 징계하소서.”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 곧이어 승정원에 이르기를 “헌부(憲府)의 소(疏)는 장영실(蔣英實)을 탄핵함이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했다. 


이로 보아 경기도 이천에다가 임금이 들릴 때 머무는 임시 궁궐인 행궁을 짓는 공사가 부실로 드러나 그 공사에 관여한 박강(朴薑)과 이순로(李順老), 그리고 이하(李夏)가 탄핵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를 조사한 곳은 사헌부라 해서 지금의 경찰이나 검찰에 해당한다.
 

타이거 우즈 사고 차량. 현대차 제너시스다. 이런 사고가 장영실 총감독 제작품에서 났다. 그러니 무사하겠는가?

 
사건 관계자들을 징벌하라는 요청에 대해 세종은 장영실에 대한 사건과 사실상 같이 처리하기로 한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데다가 사건 성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틀 뒤인 4월 27일에 장영실에 대한 징벌 수위가 결판난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를 감독하여 제조함에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 부러지고 부서지게 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1백 대를 쳐야 될 것이며, 선공직장(繕工直長) 임효돈(任孝敦)과 녹사(錄事) 최효남(崔孝男)도 안여(安輿)를 감독하여 제조하면서 장식한 쇠가 또한 견고하게 하지 아니했으며, 대호군 조순생(趙順生)은 안여가 견고하지 않은 곳을 보고 장영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으니, 모두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개를 쳐야 될 것입니다.”고 하니 임금이 장영실에게는 2등을 감형(減刑)하고, 임효돈과 최효남에게는 1등을 감형하며, 조순생은 처벌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이 대목을 통해 임금의 수레 부실 제작으로 징계위에 회부된 공무원들이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공직장(繕工直長)은 명칭으로 보아 그런 공사 감독 실무 책임자인 듯하고 녹사(錄事)는 그 아래 중간급 책임자다.
 
같이 처벌 대상에 오른 최효남이라는 사람은 장영실과 같은 대호군인데 아마 사헌부 수사 결과 “저 정도면 문제없을 거 같소”라는 식으로 말했다가 이것이 걸려 용의선상에 오른 듯하다.  

이들 중에 장영실이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은 것은 수레 만들기 총책임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임금의 안위와 관련된 징계는 곤장이었던가 본데, 애초 100대를 때려야 한다고 한 장영실은 2등을 감했다고 하니 아마 곤장 60대로 끝나지 않았나 한다.   

한데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결정 나지는 않은 듯, 형 집행이 바로 이뤄지지 않았음은 이에서 5일 정도가 지난 같은 해 5월 3일 다음과 같은 실록 기록을 보면 분명하다.  


임금이 박강·이순로·이하·장영실·임효돈·최효남의 죄를 가지고 황희(黃喜)에게 의논하게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不敬)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해야 될 것입니다.”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직첩이라 함은 국가에서 받은 각종 훈장이니 직책 등을 말한다. 임금이 머무는 집인 행궁이라든가 그에 행차하기 위한 장비인 전용 자동차인 수레 등을 부실하게 만들었다 해서 소위 말하는 삭탈관직되어 장영실은 영원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후에 행적이 다시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장영실은 재기에 실패했음이 확실하다. 곤장을 맞다가 죽었을 수도 있다. 그가 태어난 시점을 알 수 없지만, 이때 고령이었음은 확실하다.

장영실이 세종에게 총애를 듬뿍 받았다는 항간의 상식은 아마도 잘못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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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1) raw file로 대면하는 조선왕조사

[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1) raw file로 대면하는 조선왕조사

*** 내가 역사전문 언론인으로 직업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해직 시절(2015~17년)이었을 원고다. 본문이 언급되듯이 선문대 구사회 선생이 마련해준 특강 자리였으니, 그때 강연록 원고다. 물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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