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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3) 걸핏하면 뇌물죄로 걸려든 광물 전문가

by taeshik.kim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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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은 광물 전문가인 테크노크랏이었다.

 
3. 광물 전문가 

이제 장영실이 어떠한 인물인가를 실록에 드러나는 그의 행적을 통해 정리해 보자.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하건대 그가 맨 먼저 등장하는 시점은 세종 7년(1425) 4월 18일이다. 

이 날짜 한 기록에 의하면 임금이 지금의 평안도 도지사 정도에 해당하는 평안도감사에게 명을 내리기를 

“석등잔 대·중·소 아울러 30개를 이제 가는 사직(司直) 장영실(蔣英實)이 말하는 것을 들어 준비하라”

고 했다는 것이다. 
 
석등잔이란 돌로 만든 등잔을 말한다. 그 사용처가 궁중이었음을 말할 나위가 없다. 당시에는 전기가 있을 리 만무하니 밤에는 촛불을 켜서 밤을 밝혔다. 등잔은 말할 것도 없이 촛불 받침대다. 

한데 이에서 말하는 석등잔이 구체적으로 어떤 물건인지는 다른 사례를 검토해 봐야 한다. 그 결과 뜻밖의 사실이 드러난다.

석등잔은 실은 옥으로 만든 등잔이라 옥등(玉燈)이라 하는 것으로, 그 용처는 대부분 명나라 사신 선물용이다.
 
그런 등잔을 만드는 재료가 평안도 지방에서 산출된 모양이다. 그러니 그것을 구해 제작하는 책임자로 장영실이 임명되어 현지 실사를 나가게 된 모양이다.

임금의 분부는 장영실이 이런저런 일로 평안도로 가니 군소리 말고 잘 도와주라는 뜻이다. 
 

장영실 직업

 
한편 《세종실록》  부록 중 하나인 ‘지리지’에 의하면 그것을 만드는 재료인 백석(白石)이 나는 곳으로는 강원도 평창(平昌)의 동향봉(東向峯), 평안도 성천(成川)의 관음굴(觀音堀), 함길도 고원(高原)의 백석굴(白石窟)이 등장한다.

아마도 장영실은 성천의 관음굴로 향한 듯하다. 

그의 당시 직책 사직은 군인 직책이다. 이는 나중에 그가 영원히 퇴장할 때 짊어진 직책인 대호군 역시 그렇다는 점에서 그가 소속되어 활동한 곳은 요즘으로 치자면 국방부 계통인 셈이다. 

혹 군수품 납품업자 아니었나 하는 심증도 인다. 

이런 장영실이 같은 해 5월 8일 실록에 다시 등장한다. 사헌부에서 임금한테 아뢴 다음 기록이 그것이다. 

이간(李侃)의 뇌물을 받은 사람 중에서 먼저 대사성 황현(黃鉉)과 양주부사 이승직(李繩直)·한을기(韓乙奇)·황득수(黃得粹)·장영실(蔣英實)·구중덕(丘仲德)·조맹발(趙孟發)·기석손(奇碩孫) 등을 추고(推考)하고 법률에 적용하여 장물에 따라 죄를 정하온즉, 장물이 관(貫) 이하이므로 태(笞) 20대에 해당합니다.

이간이라는 사람이 뇌물을 돌린 모양이다. 그에서 장영실로 걸려들었다. 

이런 보고에 세종은 “보고한 대로 하되, 득수와 맹발만은 공신의 후손이니 논죄하지 말라”고 결정한다. 금수저의 위력은 이에서도 확인한다. 

이후 그의 행적은 뜸하다가 5년 뒤인 1430년 4월 27일에 다시 불미스런 일로 보인다. 이때 장영실은 의금부에 걸려든다.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이징(李澄)과 이군실(李君實)이 동관(東關) 노상(路上)에서 각각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참마(站馬)를 달려서 사냥하다가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욕을 보았으며, 징은 또 각 참(站)에 이르러 중국 사람을 손으로 때렸사오니, 청하건대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분간하여 징은 형장 1백 대에 처하고, 군실과 종사관(從事官) 구경부(仇敬夫)·박세달(朴世達)·장영실(蔣英實)·신서(辛黍)·홍노(洪老)·이득춘(李得春)·이초(李軺)·장현(張玄)·조일신(曹日新) 등은 형장 90대로 하며, 장후(張厚)는 검찰관으로서 사냥을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영락 21년 11월 21일 사헌부 수교에 이르기를 ‘일행이 죄를 범한 일이 있어도 숨기고 아뢰지 않는 검찰관은 제서유위(制書有違)의 죄목으로써 논한다’고 했으니 청하건대 후(厚)는 형장 1백 대에 처하게 하소서.” 

이에 (임금이) 명하여 징과 군실은 먼 지방에 옮기고, 후와 경부는 모두 직첩을 거두고 형장을 쳐서 먼 지방에 옮겼으며 세달·영실·서(黍)·노(老)·득춘·초(軺)·현(玄)·일신(日新) 등은 각각 2등을 감하고는 직첩을 거두지 말게 하되 영실과 현에게는 속전(贖錢)을 바치게 했다. 

보석금 내고 풀려난 것이다. 아마 국경을 지키던 장수가 명나라 국경을 침범하여 사냥을 하다가 사고를 친 모양인데, 장영실이 그에 걸려든 것이다. 

이 역시 장영실이 군무원이었음을 보여준다. 
 

장영실 다른 주특기는 뇌물 수수였다.



이런 장영실이 2년 뒤인 1432년 1월 4일 기사에 다시 고개를 내민다. 
 
벽동군(碧潼郡) 사람 강경순(姜敬純)이 푸른 옥[靑玉]을 얻어 진상하니 사직(司直) 장영실(蔣英實)을 보내어 채굴(採掘)케 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채취하는 일을 금지했다.

벽동군은 평안북도 초산군에 인접한 곳으로 당시에도 오지였다. 이곳에서 청옥이라는 보석 광산을 발견해 그 개발 현장 책임자로 장영실이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그가 옥등을 만들기 위한 채굴 책임자였다는 기록과 연동해 볼 때 장영실은 아마도 광물에 조예가 깊었던 듯하다. 혹은 광산 채굴에 종사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출생은 어떠한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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