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 이 있었다(5字 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郎剖卵降世生而有聖▨▨▨▨▨▨命駕」
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郎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
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履」龍頁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앞이 광개토왕이 죽어 그를 매장하고서 그 아들이 414년 건립한 이른바 광개토왕비 시조 추모 관련 기술이다.
저 중에서도 그가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이 1145년 김부식이 편집한 삼국사기에서는 어찌 기록되었는가?
주몽이 이에 오이(烏伊) 註 031·마리(摩離) 註 032·협보(陜父) 註 033 등 세 명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淹㴲水)註 034 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 두려워 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註 035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註 036 〔이후〕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같은 사건을 이야기함이 분명한데 어느 쪽이 타당하거나 합리적인가?
놀랍게도 700년 뒤에 나온 삼국사기다.
비문은 추모가 부여를 떠나는 과정이 자발적 선택인 것처럼 기술했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왜 그가 북부여를 떠나야 했는지를 감추었다. 비문이라는 특수성에서 저리했다고? 천만에. 왜곡한 것이다.
당대의 기록일수록 패배 도망 같은 일은 숨기기 마련이다.
저 비문 기술은 삼국사기 없이는(물론 다른 기록도 있기는 하지마는) 해설 이해 자체가 되지 않는다.
당대 기록일 수록 축소 왜곡 과장 자찬이 심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광개토왕이 백제 어디를 얼만큼 때려부수었네?
그걸 어케 믿어? 믿는 놈이 바보 등신 천치다.
이런 바보 등신 천치가 넘쳐난다.
(2017.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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